생명을 바쳐 모셨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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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천제
2003년 07월 257호
1953년도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성철 노사를 모시고 머리를 깎았으니, 올해로 출가한 지 꼭 쉰 해가 된다. ‘위대한 스님을 모시고 살았다’는 것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는데, 지난 시절을 되돌려보라고 해서 옛 시절을 더듬어보긴 하는데, 어쩐지 격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열네 살 되던 해 가을, 육이오 전쟁으로 병을 얻은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안정사로 부친의 사십구재를 모시러 갔다가 속가의 부친 대신 스님을 부친으로, 스승으로 얻은 것이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나도 더이상 살지 못할 것 같았는데, 거기서 스님을 만나고부터 다시 살 것 같다는 생각으로 살기 시작했으니까, 그게 전생의 인연이 아닌가 느껴진다.
그 후 내가 서둘러서 모친을 비롯한 동생 다섯을 절에 가 살게 했으니, 그렇게 해서 온 가족이 모두 출가를 하게 된 것이다. 지금 내 책상 위엔, 그로부터 십오 년 후, 스님이 해인사에서 ‘백일법문’을 할 당시, 스님께서 법문을 들으러 온 식구들에게 ‘십오 년 된 기념으로 너희들 사진 하나 찍으라’고 해서 서둘러 자리를 마련해 우리 육남매가 한자리에 모여 스님을 가운데 뫼시고 찍은 빛바랜 흑백 사진이 하나 놓여 있다.
내가 처음 절에 와서 노장님이 일러준 것을 그대로 써 놓은 공책을 펴보면, 이런 구절이 보인다. ‘수시여전受施如箭’, 즉 보시 받는 것을 날아오는 화살 받는 것처럼 하라는 뜻이다. 그 당시 노장님의 ‘중들이 돈의 노예가 되어서 스승이 아니고 종이다’라는 말씀과 함께 들은 것을 메모한 것이다.
말씀하듯 법문하셨던 그당시 들었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메모로 남아 있다.
“어려운 가운데 가장 어려움은 알고도 모르는 체 함이요, 용맹 가운데 가장 용맹스러움은 옳고도 지는 것이니라. 공부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남의 허물을 쓰는(대신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위대한 인물은 모든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이다.”
처음에 절에 왔을 때 노장님께서 읽게 한 책이 〈초발심자경문〉인데, 하루 한쪽씩 외우느라 종아리를 맞기도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 다음 기억나는 게 〈채근담〉과 〈한산시〉를 외우게 한 것이다. 그리고 한문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하시면서 사서삼경을 외우게 했고, 시간 나는 대로 불교교리를 익히게 했다. 그리고 안정사를 떠나 성전암에 살 때 일이지만, ‘백일법문’ 때 하셨던 법문을 미리 들려주었던 일도 기억나는 일 중의 하나다.
혹자는 ‘스님께서 상좌들에게 그렇게 혼을 내셨다고 하는데 어떻게 견뎠느냐’고 묻기도 하는데, 노장님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또 자기와의 약속을 철저히 잘 지킨 엄한 분이었다. 그래서 늘 솔선 수범했으므로, 정해놓은 규칙에서 벗어나면 잘하라는 의미에서 엄했지, 이유없이 야단을 치고 그런 것은 아니다. 대단히 엄했지만, 나에게는 엄한 부분만 있었던 게 아니고 따뜻하게 대해주시고 가르침을 주었기에, 열심히 시봉하고 살았다.
안정사 천제굴엔 조그만 법당 한 채, 그리고 노장님이 머물던 윗채, 내가 있던 식당채가 있었다. 그곳에서 스님과 단둘이 살았는데, 그 당시 스님은 대단한 도인이라고 소문이 나 있었을 뿐 아니라, 귀신을 떼는 실력을 가진 도인이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래서 귀신이 붙었느니 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조상의 영혼을 좋은 곳으로 가게 염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여, 그때 전경轉經을 처음으로 했다.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는 형식이 아니고, 염불을 해서 영가로 하여금 광명을 얻도록 해서 천도되는 의식으로 전경을 읽어준 것이다. 처음에는 심경을 세 편 읽다가 너무 단조롭다고 해서, 대보누각다라니, 무량수여래근본다라니 등을 넣고, 광명진언을 108번을 했다. 지금 이곳 해월정사에서 하고 있는 전경이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노장님은, 스님들이 부처님을 모셔놓고 경을 읽어주는데, 구원을 받아야 할 영가가 음식을 차려놓고 밥상을 받으면, 스님과 영가의 주객이 전도되고 불법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 하여 일체 시식을 하지 못하게 했다. 지금도 나는 재를 지낼 때 일체 경을 읽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불공에 대해서도, 자신의 죄업을 참회하고 수행정진하는 것으로 불공을 드려야지, 복 달라는 것으로 불공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절에 와서 예배하는 것 말고는 ‘아무 데 사는 누구 복 주라’는 축원은 절대 하지 못하게 했다. 복은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멸하는 데서 생긴다는 게 노장님의 생각이었다. 매일 참회기도를 하며 신역능엄주를 외우고 108배를 했던 것도 그 시절이었다.
그리고 등을 다는 것에 대해서도, 본인이 와서 등을 다는 것은 백천 개를 달아도 상관없지만, 돈이 많은 사람에게는 큰 것을 달아주는 것과 같은 장사는 절대 하지 못하게 했다. 신도들에게 그들의 스승으로서 부처님 법을 전하고 보수를 받을지언정 다른 것으로 장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신도들에게 돈을 받는 것은 날아오는 화살을 받는 것’이라고 한 가르침은 돌아가실 때까지 한결같았다.
노장님은 불교가 너무 늙고, 또 할머니들이 불공이나 드리는 모습으로 불교가 비쳐진 것에 대해서 대단히 마음 아파했다. 조선과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미신화되고 토속화되어 제 모습을 잃은 불교에서 탈피해서 본래의 면목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에 대단한 노력을 하신 분이다.
그래서 안정사를 떠나 성전암에 머물면서 선진 학계의 자료를 구하고 모으는 노력을 많이 했고 앞선 학설들을 끌어들여 불교를 설명하는 데 애썼다. 《반야심경》이나 《금강경》 등의 해석을 앞선 논리에 접목시켰던 것도, 팔공산에 계시면서 했던 숨은 노력의 결실이었다. 예를 들자면, 《금강경》의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벗어나야 불지를 이룬다’는 해석에서, 아상을 주관으로, 인상을 객관으로, 중생상을 공간으로, 수자상을 시간으로 현실적인 설명을 한 것은 노장님만의 독특한 지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조용히 은둔해 있던 시기였지만, 나름대로 미래를 향한 준비를 한 기간에 노장님을 모시면서 심부름을 한 시간들이 내게는 보람이었다고 회고된다.
노장님은 늘 그러셨다. ‘내가 하는 말은 내 말이 아니다. 부처님 말씀을 수행하고 전하는 일이 내 할 일이다.’라고. 그러니까 그분은 평생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일을 당신 할 일로 생각하고 살았고, 자신의 개인 주장을 별로 한 일이 없으신 분이다. 그처럼 나 또한 그렇다. 노장님이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산 것처럼, 나도 스승의 말씀을 따라 살았을 뿐, 다른 얘기는 따로 할 것이 없고, 내세울 것도 없다. 생명을 바쳐 모셨을 뿐이다.
1953년도에 절에 들어가 1963년도 팔공산 성전암을 나올 때쯤 사미계를 받게 되었는데, 그때 노장님이 ‘나는 평생 상좌 안 두기로 했으니 다른 사람을 은사로 정해라’ 하셨다. 그래서 내가 ‘십 년을 행자로 살았는데 이십 년인들 못 살겠습니까. 중 안 되고 평생 살겠습니다’라고 그랬다. 그러고 얼마 되지 않아 자운 스님께 계를 주라고 일러놓아서 해인사에 가서 계를 받게 되었다.
아마도 조계종사에 전무후무할 십 년 동안의 행자시절을 끝으로, ‘중생의 업이 다하기 전에는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뜻으로 지었던 천제굴의 이름 그대로 ‘천제闡提’라는 이름을 받았다. 입적하실 때까지 함께한 꼭 사십 년의 세월 중, 노장님 곁에 있었던 십 년 세월의 행자시절이었다.□
취재·정리/박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