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는 역대로 많은 고승 대덕이 주석했던 곳인데,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유정惟政(1544~1610) 스님이 그 가운데 한 분이다. 유정의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이라고 하며 속성은 임씨任氏이다.
송운은 1608년 선조宣祖가 승하한 뒤 해인사에 들어와 여생을 보내다가 입적했는데, 시와 글씨에 두루 능하였다. 시는 유가의 선비들과 능히 수창酬唱할 만했으며 글씨는 특히 초서를 잘 썼다고 한다. 송운이 입적한 후 그 호를 딴 사명당에는 진영眞影과 함께 송운의 금금가사金錦袈裟 백단장삼白段長衫 등 유품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 유품 가운데는 자신의 시와 필적은 물론 그 스승인 청허淸虛 휴정休靜(1520~1604)의 시와 필적 그리고 유가에 교분을 맺었던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1517~1563)의 소간小簡을 붙인 병풍도 있었다.
이 유품들은 송운의 도반이었던 천운天運에 의해 잘 보존되었는데, 천운은 송운이 해인사에 주석할 당시 함께 수도하는 여가에 시를 주고 받으며 성정性情을 도야陶冶하기도 했다. 천운이 87세 되는 1629년(인조 7)에 현와弦窩 이도李(1593~1668)라는 선비가 여러 벗들과 함께 가야산을 유람하던 중 해인사에서 천운을 만나보고 송운의 유품을 열람하는 기회를 가졌는데, 현와는 특히 병풍에 있는 송운의 시에 ‘금성金聲’이 들리고 글씨에 ‘철획鐵’이 느껴진다고 하였다.
그리고 현와는 이 노스님을 위하여 한 수의 시를 읊어 주기를
대사팔십칠 大師八十七 대사의 연세 여든 일곱
노학형용구 老鶴形容 늙은 학처럼 여윈 모습일세.
기내순장갈 其柰脣長竭 입술 마른 것이야 어쩔 수 없으나
무령치역고 無令齒亦枯 이는 또한 쇠하지 말아야 하리라.
송존유가대 松存猶可對 소나무 있어 오히려 대할 만하나
운거경난호 雲去竟難呼 구름 떠남에 마침내 부르기 어렵구려.
일장서의구 一障書依舊 한 병풍의 글씨 여전하니
음아의미고 吟意未孤 읊조림에 의사가 외롭지 않으리.
라고 했는데, 제3련에 ‘송운松雲’으로 말을 시작한 것은 대사와 송운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서 송운을 먼저 보내고 높은 연세에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대사를 위로하려는 뜻이 다소 느껴진다. 그 무렵 병풍에 남은 송운의 시를 읊고 글씨를 완상하던 천운의 의사는 이 시를 얻어 더욱 외롭지 않았으리라.□
필자 주 : 이상의 기록은 <<현와집弦窩集>> 권8에 실린 <유가야록遊伽倻錄>을 바탕으로 하였다. <<현와집>>의 저자인 이도의 자는 자소子韶, 호는 현와, 본관은 전주이다. 광해조에 영남으로 내려와 고령 귀담龜潭[현재의 귀원]에 정착하였으며 그 후손은 지금까지 이 곳에 세거하고 있다.
김홍영 님은 한학자로 대구의 문우관文友觀에서 한문 강의 및 번역에 종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