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은데요.시적암은 남면 내리의 가장 끝집으로 동네와는 5리 정도 떨어져 있다. 전기도 없고 전화도 없는 유일한 집. 그래서 밤이면 세상의 모든 별들이 마당으로 쏟아져 내려와 자신의 존재를 알리느라 아우성치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와 한동안 법장 스님은 그들의 아름다움에 도취돼 문 열고 하늘바라기 하며 시간 가는줄 모르고 앉아 있기 일쑤였다고 한다.
낮에는 물소리와 새소리뿐인 산골. 간혹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가 적막을 깨고 온 산으로 흩어진다. 오지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의 발길은 거의 없다. 애초 작은 암자 자리라도 됐으면 드물게라도 촌로의 발길이 이어졌을 터이지만, 차밭 자리였으니 동네사람들은 예까지 올 일이 없다.
뒤로는 모후산이 감싸고 있고 앞으로는 맑은 시내가 흐르고, 전화가 없으니 외부와의 연락이 닿길 하나 공부하기에는 이보다 더좋은 장소를 찾기 힘들어 보인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굳이 고집한 것은 아닌데 또 이런 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봄이면 봄꽃들이 온 산을 수놓고, 가을이면 단풍으로 온 산을 물들인다.
절 앞으로 흐르는 계곡의 수량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맑고 깨끗해 이 물로 음식을 만들면 맛이 있다고 찾아오는 이들은 입을 모은다. 신선놀음이다.
워낙 사람을 좋아하고 차 마시며 얘기하기를 즐겨하는 편이라 늘 주위에 사람이 많았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늘 즐겁게 받아들이던 나날들이, 어느 순간 무척 번거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점점 상업화 세속화돼 가는 절집에 회의도 동반했다.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출가할 때의 초발심을 떠올리며 두렵기까지 했다.
‘이제는 정말 도를 닦아야겠다.’
해인사 10년 생활을 정리하고 공부 장소로 삼을 만한 터를 물색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땅 한뙈기 사는 게 그렇게 힘이 들고 어려운 일인 줄 처음 알았다고 한다. 땅도 인연이 있는지 성사될 듯 될 듯 안되기를 수차례. 지치다 못해 포기할 즈음에 나타난 것이 지금의 시적암 자리. 좋고 나쁘고를 따질 것도 없이 덜컥 사버렸다. 그리고 그 땅에 근사한 절이 지어졌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스님 부자셨네요.’라며 은근한 눈길을 보내지만 실상은 돈이 아니라 운인 듯싶다.
시골에 빈집 있으면 뜯어다 지으면 되지 생각했다. 크기도 공부하고 잠잘 수만 있으면 된다 싶었는데, 어쩌다 납골당 짓다 부도난 건축주와 연결이 돼 거저다 싶을 정도로 싸게 큰 건물이 완성되었다. 부처님도 모시고 부처님 뒤에는 대장경으로 탱화를 대신하였다.
절 이름은 지명에서 따와 스님이 지은 것이다. 이곳의 지명이 쟁이다. 절 앞에 위치한 고염나무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동네 사람들의 말이다. 그래서 감나무 시枾자를 넣어 시적암이라 지었다. “쟁이에서 열반적정에 들리라”는 뜻을 담은 것이다. 그런데 실제 한자는 감나무 시에서 음사한 이시(是)자를 써 시적암是寂庵이 되었다.
농사는 먹을 만큼의 채소만을 심으려는 생각이었는데, 자꾸 욕심이 늘어나 지금은 제법 밭의 규모가 늘었다. 물론 수확도 많아졌다.
첫해 농사는 물론 실패였다. 비가 너무 많이 와 따두었던 고추가 모두 썩어버렸기 때문이다. 실패하면서도 자꾸 오기가 생겨 본때 있게 지어보고 싶은 마음으로 퇴비도 주고, 이랑에 비닐도 덮고 모종을 심어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보는 것은 농사 지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재미다. 농사가 잘돼 여럿이 나눠먹을 수 있을 때 그 재미 역시 나누어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봄이면 나물 뜯으러 온 산을 헤매고, 찬바람이 일면 애호박을 말려 봄에 뜯은 산나물과 함께 지인들께 보낸다. 손이 보통 가는 것이 아니지만 여럿이 즐겁기 위한 일이라고 스님은 말한다.
어디 즐거움만 있을까. 태풍에 산길이 무너진 통에 유배생활 아닌 유배생활을 할 때는 외로움에 눈시울을 적신 적도 있다. 자연도 현실도 결코 녹록한 대상이 아니었다. 소유는 고통의 뿌리라더니 그에 대한 책임이 뒤따라야 했고 책임은 땀방울을 요구했다. 별들에 취해 한없이 밖에 서 있던 시간도 줄어들었다. 좀처럼 구경할 수 없던 먹이감의 등장에 모기들이 떼 지어 달려드는 통에 모깃불을 피워야 했고, 방문마다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 촘촘한 방충망도 달았다. 자연은 낭만이 아닌 현실이었다.
고추가 무럭무럭 클 즈음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벌레들을 퇴치하기 위해 고추밭에 직접 약도 뿌린다. 그러지 않으면 진딧물이 달려들어 수확을 거둘 수가 없다. 농사꾼이 다 돼가고 있는 중이다. 동네 노파가 와서 농사기술이 없는 스님에게 코치를 해주고는 있지만, 그래도 결국은 스님 손이 다 가야하기 때문에 잔손이 많이 가는 여름이면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다. 갈 곳은 없지만 그래도 가끔 시내에 갈 일이 생겨도 나서기가 쉽지 않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혼자이다 보니 절을 비워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도반 스님 한 분이 함께 살았다. 애초부터 혼자 살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가버렸다. 가끔 놀러오는 사람들은 재미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살다보면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특히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어둑어둑해지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요즘은 스님들도 공부하려면 컴퓨터가 있어야 하는데, 전기가 없으니 컴퓨터를 사용할 수도 없고, 어둑어둑만 해져도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머물 수가 없는 것이다. 냉장고가 없어 채소가 썩어나가는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무엇보다 집 지을 때 방에 보일러 시설을 해놓았는데, 전기가 없으니 보일러가 돌아가지 않는다. 산중이라 여름에도 저녁에는 서늘한 기운이 도는데. 어렵게 발전기를 하나 구입해 전등은 못 켜도 저녁에 보일러만 돌아갈 수 있도록 하고 있기는 한데, 그게 또 왜 그리 고장이 잦은지. 그러니 발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다. 지난 번에는 저런 소리 나더니 고장났는데 하며 신경이 곤두선다. 아예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줄 알았으면 나무를 때는 아궁이라도 만들었으면 됐을 텐데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어리석음이 잘못이었다. 그나마 불 때는 방 하나는 거의 고추를 말리는 데 내주어야 한다.
일전에는 광주에 사는 어떤 처사가 왔다가 마당에 풀이 무성하게 자란 것을 보고 다음에 올 때 풀깎이를 사서 오겠다고 해서, 그것 기다리며 비 온 뒤 훌쩍 커버린 풀들을 깎지 않고 내버려두었더니 또 몇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길래 볼일이 있어 근처에 갔다가 들러서 상기시켜 주었더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생활이 단조로워서 그런지 누가 와서 한 약속을 꼭꼭 새겨두고 있는데, 떠난 이들은 금세 잊어버리는 모양이다. 그래서 요즘은 약속을 잘 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다. 괜히 남에게 부담만 주는 것같기도 하고. 생활에 필요한 물건이라 기다리기도 하지만 사람이 그리운 것이 얹혀져 더 기다려지는 것도 같다.
이제는 공부 좀 제대로 해보겠다며 야무진 마음으로 절을 지은 지 벌써 5년째에 접어들었다. 나아지겠지 나아지겠지 하며 지내다 보니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줄어들지 않는다. 혹 누가 찾아오는 날은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단다.
스님은 최근에 책을 한 권 냈다. 시인으로 등단한 지는 오래지만 자신의 책을 낸 적은 없는데 이번에 <월간해인>이며 불교계 신문 등에 썼던 글들을 모아 엮은 것이다. 그 제목이 《사람이 그리운 산골이야기》. 책 속에는 이곳 생활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는데 제목에도 스님의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책을 낸 이유 가운데 하나가 돈 좀 벌어 전기를 놓기 위해서란다. 그런데 요즘 출판계가 경제침체와 함께 불황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 돈을 벌 수 있으려나, 걱정이다. 그러면 또 그냥 이대로 살지 뭐.
마당 한켠에 죽 늘어선 장독 속을 보니 항아리마다 된장이 가득하다. 절에서 이 많은 것을 다 먹을 리는 없고, 오는 이 가는 이에게 조금씩 퍼줄 참인 모양이다. 스님의 인심이 풍채만큼이나 후하다.
쟁이에서 열반적정하시길.□
취재·정리/이연정, 사진/백종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