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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Matrix)세계는 왜 이리 시끄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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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변양균 2003년 07월 257호
정부정책에 반응 대조표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네오, 너무나 현실 같은 꿈을 꾸어본 적이 있나요? 그렇다면 꿈속과 현실 세계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지요?” (영화 ‘매트릭스’ 중에서)
헐리우드 영화 ‘매트릭스’는 대단히 철학적인 영화다.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컴퓨터가 만들어 낸 가상현실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은 과연 진실인가?”
매트릭스 앞에서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가상현실이냐고 묻는 출발점의 질문은 플라톤의 이데아, 장자의 호접몽胡蝶夢과 일맥 상통한다. 나는 이 영화가 던지는 철학적 질문 앞에서 문득 지금의 한국 사회를 생각해본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지 5개월도 채 안 되었지만, 어느 신문 칼럼에서는 ‘정권 초냐, 정권 말기냐’를 제목으로 삼을 정도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곳곳이 시끄럽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사실, 한국 사회는 그동안 조용한 날이 없었다. 한국은 도대체 왜 이렇게 시끄러운 것일까. 그것은 저마다 각자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 자신이 믿고 있는 것들이 진실이라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은 과연 진실인가?’
‘매트릭스’라는 속세俗世에 살고 있는 우리, 지금 이 시점에서 각자의 신념이나 가치관을 한번쯤 의심해 보는 객관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각자 저마다의 진실
저마다의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너무 많아 발생된 한국 사회의 시끄러움은 급격한 변화가 빚은 역동성 때문이다.
우선, 우리 사회 구성원들만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나라도 드물다.
1960년대 이전에 태어난 50대와 그 윗세대들은 대부분, 전형적인 농촌에서 자랐다. 이에 비해, 30~40대는 본격적인 산업화·도시화와 함께 자라온 세대이다. 이들은 바야흐로 배고픔에서 벗어나 고도성장의 과실을 처음으로 맛본 세대다. 빈곤하고 열악한 성장환경과 풍족하고 어려움이 없는 성장환경은 행동과 사고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지금 자라나고 있는 10~20대와 그 아래 세대들은 어떤가. 이들은 인구 100명당 인터넷 서버 수와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 수에서 세계 1위(0.9대 및 17.2명), 인터넷 이용자 수에서 세계 3위(51.1명)의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자라나고 있는 새로운 세대다. 한마디로 PC와 핸드폰을 장난감으로 삼아 성장해 온 또 다른 인류인 것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세대가 보는 세상은 얼마나 다를까? 정부정책에 대한 반응은 어떻게 다를까?
이를 단순화해 그림으로 표현해 보았다.
60년대 이전 농경사회 세대는 ‘수확 체감’ 세대다. 정부에서 아무리 투입을 많이 해도 이 세대가 산출해 내는 생산량은 갈수록 줄어든다(선A). 행동이 느리면서 정부 정책에 대한 기대수준도, 산출도 크지 않다.
한편, 30~40대 산업화 세대는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이 가져오는 ‘수확체증’ 세대다. 하나를 투입하면 두 개, 세 개의 산출이 나온다(선B). 이 세대는, 앞 세대보다 당연히 부지런할 수밖에 없고 보상에 대한 기대도 크다. 정부정책에 대한 반응도 그만큼 빠르다.
이에 비해, 10~20대 지식·정보화 사회의 구성원들은 ‘수확 폭증’ 세대다(선C). 이른바, 컴퓨터 칩의 처리 능력이 18개월마다 2배로 늘어난다는 이른바 ‘Moore 법칙’이 통하는 세대다. 이들의 생산성은 가히 폭발적이며 이들은 단순히, 부지런함을 뛰어넘어 경계없는 역동성을 보인다. 정부정책에 대한 반응도 초고속이다.
정부가 하는 일(정책투입)에 대한 세대간의 기대 수준을 살펴보면, 이처럼 어떤 일을 하건(가로축의 지점①, 지점②) 세로축의 기대효과나 반응은 항상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

압축성장의 나라
물론 세대별로 이렇게 다른 생각을 갖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세계 유례없는 압축성장 때문이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민지에서 해방된 국가 중에서 수십년 만에 국민소득 1만불 시대에 진입한 거의 유일한 나라다. 불과 십수년 만에 서슬퍼런 독재국가에서 현직 대통령과 언론이 씨름하는 민주국가로 변화시킨 나라이기도 하다.
서구의 경우 산업혁명을 통해 농경사회가 산업사회로 전환되고 상당한 기간을 두고 산업사회가 성숙된 후 다시 지식·정보화 사회로 전환되어 왔다. 영국이 170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산업혁명에 돌입하였고 후발국인 독일과 일본도 1800년대 중후반에 산업혁명에 돌입하였으므로 대략 150~200년의 기간을 거쳐 생산구조가 변해 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불과 30년 만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산업화는 그 당시 인구에 회자된 ‘농공병진農工竝進이 가능한가?’라는 명제가 말해주듯 아직 농업기반도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업화의 기치를 내세웠다. 그리고 불과 30년 만인 1990년대 중반에 산업화의 성숙 여부를 점검할 겨를도 없이 인터넷과 반도체의 ‘지식·정보화 사회’에 접속해 버렸다.
정치적 변화과정은 더욱 드라마틱하다.
서구사회가 민주주의를 운영한 경험은 약 200~300년 정도이다. 1689년 영국의 명예혁명, 1787년 미국의 독립,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등을 그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 그 후 보수 반동의 시기, 전체주의 시대 등의 격변을 겪으면서 대략 1800년대 중반경에는 민주주의 체제가 나름대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민주주의의 시발점은 이른바, People power가 분출된 1960년 4·19 혁명이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40여 년 전이다. 따지고 보면, 실제 민주적인 정부를 운영한 기간은 더욱 일천하다. 문민정부를 기점으로 할 경우 이제 겨우 10년밖에 되지 않았다.

국가와 정부를 보는 서로 다른 견해
이러다보니, 국가나 정부에 대한 생각도 세대별로, 사람별로 모두 다르다.
왕조적인 이승만 정권과 유신시대, 지난 5~6공화국 시절을 순응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국가’란 복종하고 따라야 할 지도자적 존재이다. 하지만 잠들지 않는 비판정신으로 독재의 횡포와 권위에 끝없이 저항해 온 사람들이나 그로 인해 아물지 않은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국가’란 언제라도 개인의 권리를 쉽게 짓밟아 버릴 수 있는 비양심적 위험집단이다. 여기에다가 또 자신을 희생하면서 공산주의자들과 잔혹한 전쟁을 겪으면서 ‘국가’를 지켜낸 분들도 엄연히 함께 존재한다.
나는 최근 NEIS를 둘러싼 전교조의 주장도 ‘옳다 그르다’를 떠나 이런 국가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를 드러낸 일이라고 본다. 전교조 측에서는 NEIS가 사생활을 침해한다고 하지만, 정보화 사회에서 이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예를 들어 의료보험을 처리하는 정보시스템만 봐도 국민들의 상세한 건강정보가 입력되고 있다. 누가 언제 어디가 아팠는지 개인과 집안의 병력이 상세히 담겨 있다.
이뿐인가, 경찰청 종합정보시스템도 민감한 개인 정보를 담고 있다. 교통법규 위반, 어음·수표 부도 경력 등 개인의 다양한 법 위반사실들이 들어 있다. 신용카드를 통해 입력되는 정보는 더욱 놀랍다. 당신이 어제 산 옷, 자주 가는 음식점, 어젯밤 다녀온 술집까지, 우리의 은밀한 행적과 사적인 습관들이 모두 담겨 있다. 이처럼 모든 일상생활이 속속 사이버 공간에 입력되고 있는 정보화 사회에서 개인 신상정보의 입력은 별로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이를 인권 침해와 연결시키는 전교조의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하지만 지난 역사에서 공권력 남용을 경험한 바 있는 우리들은 전교조 교사들이 제기하는 정보 남용과 인권 침해의 우려가 무조건 틀렸다고만은 할 수 없다. 이미 과거 정권을 통해 국가나 정부를 마냥 믿을 수는 없다는 불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다르지만 같은 평등의식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런 세대별, 집단별로 다종다양한 의식의 스펙트럼을 갖고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와 정반대되는 동질감과 평등의식을 갖고 있다는 데 현실의 복잡성이 존재한다. 5천년 단일 민족이라는 동질감, 전쟁의 폐허 위에서 불굴의 의지로 위기를 딛고 일어섰다는 자신감은 2002년 한일 월드컵 응원에서도 보여졌듯 우리를 하나로 묶고 있다.
우리 사회에 통용되는 ‘사회적 위화감’이라는 말은 동질성을 표현한 단적인 예다. 사실, 사회적 위화감이라는 단어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그리 자주 쓸 수 있는 용어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 사회적 위화감은 정책결정의 핵심 고려사항이다. 교육정책, 부동산 정책, 모든 분야에서 ‘사회적 위화감을 조성해서는 안 된다’라는 보이지 않는 규제가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서구사회는 상당히 균일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서로의 생각과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쉽게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다르면서도 서로 같아야 한다는 고통의 자물쇠에 묶여 있다. 여기에 GDP규모 세계 13위의 OECD 국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제시대 동사무소제도, 파출소제도, 호적제도, 호주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 FTA를 전혀 체결하지 않고 금융노조가 있는 세계 13위의 수출대국이 바로 우리 나라다.
이처럼 지난 수십 년간 롤러코스터 같은 변화가 일상생활이 되어 버린 나라가 과연 조용할 수 있을까. 세대간 갈등이 단순히 입장 차이를 넘어선 잠재의식과 사고방식의 차이까지 되어 버린 나라가, 정부에 대한 극단적인 복종과 저항의 집단이 함께 살고 있는 나라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평등화 획일화되기를 요구하는 나라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기에는 불합리한 제도와 관행이 수두룩한 나라가 과연 평온할 수 있을까?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자, 그렇다면 이런 시끄러운 나라의 ‘국가 경영진’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Matrix2에서 ‘세상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질문이 던져진다. 어차피 복잡한 세상에 정부가 모든 사안 하나 하나를 깔끔하게 조정할 수 없다면, 개별 사안마다 정답을 내리려는 시도 자체가 오히려 갈등을 재촉할 수 있다면, 국가경영의 미덕은 ‘내버려두는 데’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국가의 장래를 자신의 정치적 이해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큰 비전을 제시하고, 시장경제체제와 자유민주주의의 틀이 확고하게 지켜지는 게임의 규칙(rule of game) 속에서 사회구성원들이 마음껏 토론하고 갈등하도록 내버려 두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국가가 수행해야 할 ‘기본기능’에 충실하면서 나머지 갈등들은 건강하게 분출하도록 해 성숙한 결론으로 유도할 수 있는, 조용하지만 큰 국가 경영의 묘가 발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각자 저마다의 진실에서 깨어나, 우리를 사로잡는 미망에서 깨어나, 주인공 ‘네오’가 Matrix가 가상세계라는 진실을 깨닫듯이 서로를 인정하고 포용하도록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가 수행해야 할 ‘변화하지 않는’ 기본 기능들이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기본수요(basic needs)를 충족시켜 주는 일이다.
불행히도, 우리 나라에서는 이러한 기본 기능들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국민의 기본수요 중 ①의衣 ②식食만을 해결한 상태이고 아직도 ③주住 ④의醫 ⑤교육敎育 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이다. 정부 부담을 제외한 학부모만의 교육비 부담이 GDP 대비 7.3%로서 OECD 평균의 7배(OECD평균 1% 미만 추정)를 상회하고 있다(KEDI자료). 소득에서 주거비가 차지하는 비중도 물가가 비싸다는 일본보다도 2배 이상 높은 것으로 되어 있다(LG경제연구원 자료). 저소득층으로 가면 이러한 부담은 더욱 커지게 된다. 기본수요가 제공되지 못하면 기회의 평등이 이루어질 수 없다. 빈곤은 세습되고 사회갈등은 더욱 깊어진다.
여기에 우리는 민족의 안녕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안보기능조차도 독자 수행할 수 없는 나라이다. 19C부터 이어진 미·일·중·러의 4대 열강구도가 아직 엄연히 우리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땅과 주권을 지키는 일에도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
어차피 변해 버릴 수밖에 없는 수많은 시끄러움으로 뒤덮여 버린 우리 사회, 그 속에 변하지 않는 기본기능들이 아직도 너무나도 미흡한 나라이기에 묵묵한 자세로 담담한 국가경영의 깨달음을 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강남 고급 아파트 투기대책보다는 중산서민층을 위한 안정적 주택공급과 합리적 국토이용에 고민하는 선 굵은 정책이 필요하다. 학교 정보화에 정신이 팔리기보다는 맘껏 공부할 수 있는 기회와 전 세계와 경쟁할 수 있는 인재양성에 고민하는 교육정책이 필요하다. 그리고 곧 닥쳐올 통일에도 대비해야 한다.
저 마다의 미망 속에서 시끄러울 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가 그 미망을 꿰뚫을 수 있는 깨달음으로 다시 살아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