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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의 신통-내원사의 창건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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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설명 - 편집실 1984년 02월 24호
원효대사는 한국은 물론이요 중국과 일본에 널리 알려진 분이다. 그는 학승으로서 뿐만 아나라 도승으로도 전설적인 기적을 많이 남겨 놓았다. 다음의 이야기도 그 중의 한가지.
하루는 원효대사가 선정삼매(禪定三昧) 중에 중국 대륙을 관(觀)해 보니 중국 장안의 종남산 운제사라는 큰 절이 여름 장마로 뒷산이 무너져 도괴 직전의 순간이었다. 운제사라는 절은 중국에서도 유명한 선방으로 그 당시 천명 대중이 큰 방에서 정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원효대사는 천명 대중의 생명이 위급함을 간파하시고 깔고 앉았던 널판자를 중국 대륙을 향해 날려 보냈다. 이때 운제사의 스님 한 분이 도량을 거닐고 있다가 이상한 물건이 마당 한 가운데서 빙빙 풀고 있는 것을 보고 큰 방에 들어가서 대중에게 이 사실을 전하였다. 정진중이던 천명 대중이 공중에 떠 다니는 이상한 물건을 보기 위해 마당에 나왔다. 그 순간에 뒷산이 무너지면서 큰 방을 덮쳐 절이 허물어져 버렸다.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천명 대중들이 공중에 떠 있는 이상한 물건을 보고 감사의 합창 배례를 하는데 공중에 떠 있던 널판자가 그때에사 마당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 널판자를 보니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신라의 원효가 널판자를 던져 대중을 구한다(海東元曉 擲板 救衆).」 이 글을 본 대중들이 원효대사의 도력을 흠모하여 신라 땅 원효대사를 찾아 제자 되기를 간청했다. 원효대사는 기꺼이 허락하시고 천명 대중이 수도할 곳을 찾아 지금의 양산군 하북면 용연리에 당도하자 원적산(지금의 천성산) 산신령이 마중을 나와,
-이 산에 천 명이 수도할 곳이 있으니 원적산에서 회상(會上)을 건립하소서.
하면서 산신령의 인도로 지금의 내원사 산신각까지 따라 간 즉 원적산 산신령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보통 사찰의 구조상 산신각은 기존 건물보다 위에 짓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곳 내원사는 그 당시 내원사는 그 당시 산신령이 사라진 곳에 산신각을 지어 일주문 훨씬 아래 지어져 있는 게 특색이다.) 대사는 원적산의 화연계곡에 들어가서 내원사를 창건하시고 산내에 88 암자를 두어 천 명 대중을 가르쳐 득도케 하였다. 대륙을 천명 대중의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서 대사는 그 당시 제일 가는 장자의 집에 가서 발우 하나에 양식을 가득 채워 주기를 청하였다. 장자가 몇 섬의 쌀을 발우에 부어도 채울 수 없음에 놀래어 대사의 도력이 숭고하심을 알고 내원사를 방문하여 천명 대중의 양식을 해마다 시주하였다. 원적산 상봉 아래 너른 들판에 북을 쳐서 천명 대중들을 모이게 한 후, 화엄경을 강설하였다고 하여 지금도 그 곳을 화엄벌이라 이름하며 북치던 봉우리를 집북붕이라고 한다. 또한 대중들이 북소리를 듣고 산내 암자에서 상봉으로 올라 오다가 칰넝쿨에 얽혀 넘어지는 일이 많아 대사가 신령을 불러 칰넝쿨을 없애라고 하여 천성산에는 지금까지 칰넝쿨이 없다고 한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모여 떠들석한 상태를 “야단법석”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유래는 많은 대중을 실내에 모아 설법할 수가 없어 너른 들판에 법석(野壇法席)을 차려 지도한데서 유래된 말이다.) 이렇게 하여 원효대사 밑에서 수도한 천명 대중은 모두 득도하여 성인이 되었다. 그래서 원적산의 이름을 천성산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잡역에 종사하던 12명 중 8명은 대구 동화사에 가서 득도하여 그곳 산 이름을 팔공산 (A公山) 이라 하며, 네 사람은 운경 대승사에 가서 득도하여 사불산(四佛山)이라 불리운다고 한다.
위의 이야기는 <당 고승전>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도 경상남도 동래군 장안면 불광산 장안사에는 원효대사가 널판자를 던져 대중을 구한 것을 기념하여 지은 척판암(擲板庵) 이란 암자가 남아 있다.

〈해인사 대적광천 백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