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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속의 불교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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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현종 1984년 02월 24호
서구인들이 불교를 보는 눈은 대체로 두 가지로 크게 대별 할 수가 있다. 첫째는 불교를 단순한 동양적인 윤리나 도덕을 체계화하여 실천 수행하는 정도로 이해하거나, 아니면 불교를 동양적 신비주의와 환상 세계를 추구하는 등의 이해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원인은 오랫동안 서구인들의 의식을 지배해 온 헬레니즘을 중심으로 하는 인문사회(人文社會)주의와 과학적 경험에 바탕을 둔 자연주의와 또 한편으로는 동방에 전달된 희랍 정교회와 같은 신비주의에 그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교를 보는 서구인의 눈은 다분히 철학적이거나 과학적인 근거를 찾으려는 의도가 엿보이는데 이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자면 기독교의 신(神) 중심의 기도하는 세계관으로 보면, 불교는 다분히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세계관으로 보일 것이며, 방대하고 거창한 화엄세계와 같은 대승 불교의 세계관은 다분히 신비주의와 같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기도하는 종교인 기독교적인 눈에 비친 영상의 종교인 불교는 그들에게 새로운 세계관이기 때문에 이질적(異質的)이기도 하고, 새로운 매력으로 보이기도 한다. 서구는 이미 알고 있다 싶어 하이텍거 이후의 사신(死神) 철학과 프로이드 이후의 정신 분석과 비트겐스타인의 분석 철학은 불교의 명상 중심의 선불교와 마음을 그 근거로 하는 유식사상(唯識思想)과 인도 논리학의 근본인 용수의 중관사상(中觀思想)과의 비교 종교학 분야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불교에 대한 매력은 대단하여 정신적으로 불안한 서구인들에게 큰 안식처가 되고 있다. 인간이 신의 예속물로서가 아니라, 실존하는 자존으로서의 자각과 인간 본연의 존엄성을 그 바탕에 두고 있는 선불교는 이차 세계 대전 이후의 기계 문명과 대량 살상으로 인한 휴머니즘의 상실로 방황하고 있던 서구인들의 정신적 빈곤에 새로운 자각과 인간자체에 대한 관심이 선불교에서의 자기 실존적인 자각과 일치하기 때문에 더욱 매력을 가지는 것 같다.
그러므로 이미 서구에는 기독교가 생활의 중요한 영역까지 그 종교적 역할은 확대되어 왔으나, 극히 부분적인 종교의식으로 전락하고 실제로 기독교인은 적으며 교회나 수도원은 박물관이나 유적지로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기독교적인 사유 경향이나 세계관이 없어졌다는 것은 아니며 기독교적 사유가 차츰 동양적인 세계관으로 전환되는데 그 예로 칼 바르트나 폴 틸리히 등 새로운 신학자들의 신학(神學)의 방향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서구 속에서의 불교는 미약한 상태에다. 새로운 세계관으로서의 불교사상은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철학과의 만남을 계속 시도하고 있으며, 19세기 말에 돈황에서 가져 온 중국 불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학문적인 연구는 참으로 괄목할만한 업적을 이룩하고 있다. 문제는 앞으로의 인류에게 진정한 종교적인 방향에서 인간을 구원하고 회귀할 수 있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 또 물질문명과 핵무기를 비롯한 인간의 물질적 극한 상황에서 인류의 미래를 종교가 그 정신적 지도자로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어떻튼 서구는 지금 16세기의 르네상스에서 비롯된 휴머니즘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시점에 와 있으며 극대한 물질 운영에 대한 반성과 진정한 인간 본연의 세계관으로 돌아가려는 몸부림을 계속하고 있는 이 때에 불교의 인간주의적 구원의 팡파레는 앞으로 더욱 그 빛을 더해 갈 것 같다.
세계사에서 지금까지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군림해온 서구주의가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미래의 세계를 진단하는 중요한 핵이 될 것이다.
일여 년간 서구를 체험했다고 해서 서구를 말한다는 것부터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소개할려고 한 글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갔음을 부끄러워하고 여러 제현의 넓은 이해를 바라면서 이글을 맺는다.

*필자 현종스님은 송광사 불일국제선원 분원인 스위스 불승사에 머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