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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미술의 세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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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강좌 - 취영 1984년 02월 24호
인간이 지향하는 운영의 생활에는 물질 문명과 더불어 영성(靈性)의 문영이 있다. 영성의 문명이란 곧 철학적 사색과 신앙적 체험의 산물로서 무지(無智)를 자각해 가는 표징(表徵)으로서의 종교문명이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는 인간의 이상과 동경의 주처(住處)가 되리라.
우리나라에 있어 불교는 고대의 샤머니즘 이후로 가장 깊이 한국인을 이끌어온 정신문화의 뿌리였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서양문명 특허 서양종교들의 영향으로 인한 우리의 정신적 가치체계가 흔들거리거나 변색되고 있는 것을 본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미국에서 한국의 국보 미술 전람회가 열렸을 때 우리 유학생들은 「누구 창피를 보이려고 그런 것들을 가지고 왔느냐」하며 매우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더구나 금동반가상에 대한 설명을 부탁하는 외국인에게 우리 것이 아니라고 하는 학생도 있었다고 하니 이쯤되면 부끄러움에 앞서 슬픔을 느낀다.
그럼 우리 것은 무엇인가. 마리아의 미소인가, 예수의 고상(苦像) 인가.
요즘은 우리 것에 대한 각성의 소리 속에 우리 미술에 대한 인식도 높아져 감을 본다.
우리는 동양인이며 한국인이다. 우리가 설 땅은 동양이며 한국이다. 이것은 보수적인 고집이 아니고 엄연한 현실이며 현실이다. 조상의 열을 받드는 제사를 없애고 서양식 생활에 서양종교 생활을 따른다고 해서 국제인이 되는 건 아니다. 우리의 땅이 메마르고 우리의 나무가 시들면 우리들 또한 메말라 시든다. 동양적인 미덕을 낡은 시대적인 것이라고 보는 데서 우리의 이념 인식에 혼란이 있게 된 것은 아닐까. 신시대적인 것은 무엇이며 서양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한국인으로서 우리 것에 대하여 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지는 못할망정 지나치게 모른다면 유학의 의의는 어디에서 찾겠는가.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불교미술, 특히 불상과 불화에 대한 인식은 무속적인 의미로 통념되고 있다 하니 지식 있고 자존심 높은 현대인들이 여기에서는 식견이 부족한 것 같다. 문제는 그 불상과 불화를 빚어 낸 이가 우리의 조상임을 잊고 그의 피와 정서를 뒤이은 후손임을 부정하려는 데서 생긴 것이다.
이와 같은 우리 미술에 대한 인식은 그간의 미술 교육에 가장 큰 책임이 있으니 유아원에서 중등교육 과정까지 시종 서양미술 전반에 편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미술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거니와 현재까지 매우 밀접하게 상관되어 있는 불교미술을 배울 기회란 거의 없었고 있더라도 지극히 단편적인 상식 정도이다. 호구지책에 필수 요건이 아닌 마술에 대하여 계속 유식자가 되기도 어렵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예술감정이 가장 아름답게 다듬어질 학창 시절에 보고 익힌 서양미술 이외 불교미술이라는 원색의 색조나 관념적인 신앙상을 보면 마치 노상의 당화적(唐画籍)을 보듯이 하는 미의식의 혼돈은 당연한 소이로 볼 수 밖에 없으리라.
불교는 사상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우리 민족에게는 가장 큰 영향력을 마친 토질화된 종교다. 따라서 불교 미술 역시 우리가 살아온 정신사의 가시체(可視體)로서 우리에겐 너무나 소중한 유산이며 또 이어가야 할 과업이다.
이와 같은 금일의 위치에서 앞으로 쓰게 될 불교 미술의 내용은 불교인이든 아니든 한국인으로서 한국미술의 전통이자 정신사의 한 노정(勞程)을 담당했던 미술로서의 이해를 돕는다는 측면에서 다루되 대표적인 작품과 기본적인 내용으로 한정한다. 물론 작품 속에 내재된 사상사책 사회사죄 교리사적 내용을 파악하여 종교적 실천으로 환원되어지는 과정을 살피고 그 미술품에 스며있는 고난과 희열이 존재했던 현장으로 가능한 한 가까이 접근해 봄으로써 시대정신의 이해와 불교미술 문화에 대한 바른 인식을 세우려는 의도 또한 적지 않다.
그러나 부족한 지혜와 짧은 견문으로 그 책임을 다할 수 있을지 조심스럽기 그지없다. 기도하는 자세로 붓을 적시리라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