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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의 방법론적 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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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논단 - 도수 1984년 02월 24호
석가모니의 고뇌가 삶의 근원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결국 현실을 살아가는 인생 전반을 해결하기 위했던 것임을 우리는 먼저 상기해야 한다.
그러자면 그의 깨달음에 대한 신뢰가 우선 선행되어야 할 것이고 그가 제시한 「길」의 당위성을 깨닫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생애를 답습하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길」은 적어도 불교인에게 있어서는 석가모니가 제시한 것으로도 충분하며 그의 생애를 그대로 답습한다는 것은 오히려 소승적인 것으로 그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을 통하여 석가모니가 갖추게 된 시각은 대체 어떤 것이며 그 「길」이란 과연 무엇일까?
석가모니 당시의 인도사회는 종교철학적 사유와 신앙행동이 인류사상 공전절후할 만큼 풍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유일신적 범신적 신본주의 사상은 인도사회를 강력히 지배해 왔고 카스트 제도에 의한 계급사회 형성마저도 아무런 비판 없이 수긍되어지고 순종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싯달타 역시 자아와 우주의 근본원리에 의혹을 품고 최고의 가치로 지칭되는 해탈을 얻고자 하는 전통적 관습을 따라 출가하였거니와 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는 그 방법론적인 면에서 획기적인 전환을 일으켰고 그의 깨달음을 통한 「인간선언」도 충격적이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인식주관에 의하여 대상을 파악한다는 것인데 그 실상을 여실히 파악하기 위하여는 먼저 인식주관의 주체인 자아의 파기가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관할하는 것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방식이나 시각에 따라서 도출된 대상 바로 그것인 것이다. 즉 싯달타는 「이 세계와 인생의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문제제기에 앞서 이런 모든 설문들의 정당성과 그 가능 근거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를 우선적인 명제로 삼았던 것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세계와 인생 자아의 본체와 가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집착하고 있다. 즉 그것은 유(有)에 대한 맹목적이고도 독단적인 확신이다. 유(有)를 가설이라고 전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사실처럼 인식해온 것이다.
현대에 와서까지도 거의 모든 종교와 철학사상은 유(有)를 본질로 하고 있다. 따라서 불교의 무상(無常),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 따위의 기본적 시각과는 전적으로 상반되고 있는 터이다.
불교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도록 종용하는 종교가 아니다. 존재에 대해 여실하고도 냉엄한 인식이 없이는 해탈도 구원도 기약할 수 없으며 방법상의 혼돈이 빚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有)에 대한 무조건의 믿음은 바른 인식을 위한 태도나 방법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무(無)에 대한 집착마저도 거부한다. 단지 유(有)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한 나머지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무(無)를 빌려 파(破)하고 있을 따름이다.
나중에 좀더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불교에서는 절대적인 그 어떤 것도 안정하지 않는다.
신(神)은 물론이지만 인간이나 물질, 유(有)나 무(無), 그 어떤 것도 절대성을 가질 때 불교에서는 그것을 우상이라 한다. 인식은 독단적인 가정을 완전히 붕괴시켰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해탈을 추구함에 있어서도 무지에 근거하고 있는 기존 관념을 완전히 비우고 믿을 수 있는 것 만을 믿어 가면서 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 불교적 업장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과 시각이 이 사회에 진정으로 용납됨으로써 해탈의 세계, 즉 불국토는 기약될 수가 있는 것이다.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