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 모래공양을 올린 소년-아쇼카왕의 전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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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설명 - 편집실
1984년 01월 23호
어느 때 부처님께서 아란존자와 함께 성중으로 걸식하러 가는 길에 소꼽장난하는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아이들은 모래와 흙을 가지고 집과 창고를 만들고 신발에다 모래를 담아 밥이라고 하며 놀고 있었다. 부처님께서 가까이 오신 것을 본 한 아이가 생각하기를 「부처님께 무엇이든지 공양을 올리면 큰 복을 받는다고 하던데…」하고는 신발에 밥이라고 담아 둔 모래를 부처님께 바치려고 하니 키가 너무 작은 지라 자기 동생을 엎드러게 하고 그 위에 올라가 부처님께 올리었다.
부처님께서 빙그레 웃으시며 그 모래를 받아 아란에게 주면서 「이 모래를 가지고 가서 내 방의 허물어진 곳을 바르도록 하여라.」 아란이 부처님 말씀대로 정사에 돌아와 방을 바르고 나니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아이들 두 명이 환희심으로 모래를 보시하였음에 그 공덕으로 다음에 국왕이 되어 삼보를 받들고 여래를 위하여 팔만사천보탑을 건립할 것이다」 아란이 다시 부처님께 여쭙되 「어찌에서 한줌 흙의 인연으로 그와 같은 큰 공덕을 성취할 수 있습니까?」
-과거세에 한 국왕이 있었는데 그때에 부처님께서 출세(出世)하시니 임금이 모든 신하와 더불어 부처님께 예배하고 법을 청해 들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왕은 마음이 열리고 깨우치는 바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의 기쁜 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함께 하고 싶어서 부처님의 형상을 그린 불화 팔만사천장을 보시한 공덕으로 팔만사천탑을 건립할 과보를 얻게 된 것이다. 그때의 국왕이 바로 오늘 모래를 공양한 그 소년이다.
이렇게 하여 기원전 삼세기 중엽, 인도를 통치한 아쇼카왕이 바로 부처님께 모래 공양을 올린 소년이라는 것이다. 그는 인도 오천년의 역사 가운데 가창 넓은 범위의 국토를 통일하여 다스린 이상적인 국왕이었다. 그는 전 인도를 통일하면서 전쟁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통감하고 인생의 무상을 깊이 깨달아 불교에 귀의하여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아쇼카왕이 이해하고 터득한 것은 사회와 인생의 참다운 영화는 무기와 군대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법에 의한 덕(德)의 정치에 의해서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법(法)을 널리 펴는 것만이 자기 생애의 책임이라고 느낀 그는 먼저 자가 주위에 있는 왕비와 왕자, 대신들에게 불법을 배우게 하고 일반 민중들에게도 보급시키려고 하였다. 또 왕위에 오른지 17년 되는 해에는 승려 천명을 모아 경전을 편집하는 결집(結集)을 주최하고 불교 사절단을 멀리 시리아, 이집트, 마케도니아, 키프로스, 스리랑카 등지에 까지 파견했다고 한다. 불교에 귀의한 아쇼카왕은 살생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렵을 금지케 하고 동물을 아끼며 불교 이외의 종교에도 평등한 자유를 주었다.
또 그는 전국 방방곡곡에 팔만사천의 많은 불탑과 법칙(法勅)을 새긴 석주를 새기게 하는 한편 병자를 치료하는 요양소를 세웠다. 그는 불교적인 생활규범에 철저하여 법을 모든 인도인, 모든 인류에 설하여 그 법이 철저히 생활화되도록 노력하였다. 오늘날 인도 각지에서 발견되는 아쇼카왕이 세웠다는 법칙석주에는 다음과 같은 귀절이 있다.
「전쟁에 의한 승리보다 자비에 의한 정복이 훨씬 훌륭한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나는 이러이러한 선행을 했다 하고 자기의 선한 점만 보려하지 나는 이러한 악행을 했다, 나는 이러한 번뇌를 가지고 있다, 하고 자기의 나쁜 점은 보려하지 않는다.」
이러한 조칙들에서 우리는 불교의 가르침에 근거한 자기 반성을 사랑들에게 촉구한 그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지금의 인도 국기 가운데 부분에 있는 법륜(法輪)은 아쇼카왕이 세운 석주머리 부분에 있는 사자상의 좌대에서 따온 것이다. 그 석주는 지금 사르나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오늘날의 인도연방정부도 아쇼카왕의 통치를 덕으로 하여 정치의 이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아쇼카왕이 아니었더라면 오늘날 불교가 전 인류에 희망을 주는 세계 종교로 성장하지 못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해인사 대적광전 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