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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을 찾아야 할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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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도수 1983년 12월 22호
불교의 목적은 인간에게 내재한 성(聖)스러움을 발견하여 그것을 가꾸고 열매 맺도록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인간의 진실된 삶과 행복이 깃든다 고 여기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밖으로만 구하려 했던 행복, 인간의 진실성은 그 대목에서부터 배반당해 온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존중, 생명존중을 소리 높이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비인간화가 추진되고 생명가치를 상실해 가고 있는 터이다. 한 마디로 현대 문명은 감각의 운영이라고 할 수 있다. 감각을 중시하여 감각적인 쾌락을 인생의 최상 즐거움으로 여기는 까닭에 물질적인 이익을 우선시키게 되고 따라서 인간 그 자체는 경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감각적인 욕망을 만족시켜 나가면서도 정작 진실된 행복감에 젖지는 못한다. 행복이란 일종의 만족감이라 하겠는데 감각적인 만족에 흡족해 하지 못할 뿐더러 또 다른 만족의 대상이 사방에서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그것을 추구함으로써 인간은 진실된 행복은 커녕 오히려 인간을 물질의 도구로 스스로 전락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종교까지도 경제적 정신적 불만을 해소시키는 아편과 같은 역할에 동원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이성(理性)은 더 더욱 벌어지고 감각과 감성의 노예로 치달리기만 하는 것이다. 밖으로 무작정 치닫기만 하는 욕구, 그 욕구의 절제는 무시되고 오로지 개방과 충족으로 운명의 발전이 규정되는 현대, 이러한 사회에서는 공장에서나 회사에서나 가정에서까지도 진실한 의미의 인간 존중은 뒷걸음질치기 마련이다.
자아에 내재하고 있는 성스러움을 자각하고 개척해 나가지 아니할 때 이러한 인간성 파멸은 막을 길이 없다. 명상이나 기도를 할 때 눈을 감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눈을 뜨고자 함이다.
이성과 감성의 조화, 이것을 추구함에 있어 불교는 자력과 타력을 동시에 꾀한다. 따라서 수행과 신앙의 어느 한쪽 만을 고집하여 주입시키길 꺼려한다.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것은 곧 존경심과 경건함을 일으키고자 함이며 자아의 불성(佛性)을 확인하려는 의지가 된다. 이로부터 자타일여(自他一如)의 경지로 접어들게 된다. 여기에서 삼보에 대한 불교신앙의 의미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부처님과 진리와 진실로 복된 삶은 인간의 존재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믿음과 신앙생활의 교량이다.
그러나 끊임없는 감각적 욕구, 방황과 배회의 연속, 진리와 정의로운 믿음에서의 이탈로 인해 그 설계도 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감각적이란 말은 고쳐 말하면 자극적이란 뜻과 동일하다.
선정적인 언어와 활자가 난무하고 건물과 그 장식도 뾰쪽하고 요란하며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도 칼날처럼 예민한 시대에 사람은 독성과 증오심의 입발림에 불과하며 정의는 아집의 울타리 속에 묻게 닫힌 채 상품광고처럼 이용되기 일쑤다. 약속을 신뢰하지도 못한다. 맛있는 음식을 애써 찾지만 –혓바닥을 녹이는 듯한 음식이 담박엔 좋지만-반드시 몸에 좋은 법은 아니다. 혓바닥에 얹혀진 음식은 피와, 살이 되지 못한다. 그 음식이 위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그 음식은 영양분이 된다. 그러나 위는 맛을 모르는 것이다. 순간의 쾌락과 자극은 혓바닥에 얹혀진 음식처럼 돌을 마주쳐 내는 부싯돌의 불처럼 쓸모가 없다. 콜라 없이는 살아도 물이 없이는 못사는 게 인간이다.
지금은 이성을 찾아야 할 때이다. 유한의 육체에 지난 무한의 욕망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자연이 파괴되고 인간이 파괴되는 시대를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불교는 이 길을 안내한다.
사람은 종교를 만들고 종교는 사람을 만드는 것인가. 〈스님, 불교신문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