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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과 이웃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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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사회봉사 - 영명 1983년 10월 20호
이 글에서는 불교학이나 사회복지학을 열거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불교인으로서의 보람된 삶을 위해 부처님의 자비 정신을 함께 실천해 보자는 것입니다.
종교의 기능은 이타(利他)의 자비 실천에 있습니다. 이웃을 도와주는 일을 통해서 자기 정화를 이룰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의 정화를 통해서 이웃을 도와 줄 수도 있습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보살이라고 합니다. 보살은 위로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이롭게 하는 불자를 말합니다. 보살의 수행으로 6바라밀(六波羅密)이 있는데 이는 자기 완성과 이웃 구제를 위한 실천 덕목입니다. 6바라밀의 보시(布旅), 지계(持械), 인욕(忍辱)은 이타행의 자비 실천이며 하화중생(下化聚生)의 생활입니다. 그리고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는 자리행인 상구보리(上求菩提)의 수행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자비행이 먼저이고 수행이 다음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스스로는 아직 제도 받지 못했지만 이웃을 먼저 제도한다.」는 대승 정신과 상통합니다. 또 보살은 이웃을 교화하는 방편으로 사섭법(四攝法)을 실천합니다. 보시는 베풂의 생활이며, 애어(愛語)는 자비로운 말로 이끌어 주는 것이며, 이행(利行)은 누구에게나 참된 이익을 주는 일이며, 동사(同事)는 남과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생활입니다.
불교도 가운데에는 흔히 「자기도 깨닫지 못한 자가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은 맹인이 길을 인도하는 거와 같다」고 하여 깨달음만을 중요시하고 자비행은 뒷전에 두는 이가 많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돕는다”, “봉사한다” 할 때, 가진 자들이나 전문가들만이 할 수 있다고 흔히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진실한 봉사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은 자신의 내적 성장이며, 이웃과의 주고 받는 관계를 통해서 소원한 사이가 자연스런 관계로 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에도「중생은 보살의 복전이다. 중생이 없이는 보살은 깨달음 성취할 수 없다. 중생으로 인해 자비심이 일어나고, 자비심으로 인해 보리심이 일어나며. 보리심으로 인해 깨달음을 성취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찾아가는 나환자촌, 교도소, 갱생원, 보육원등에서 그 분들 앞에 마주 서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고 주어야 할지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사이에 이토록 빈곤해야 할지 부끄러울 뿐입니다. 정작 그분들이 바로 부처님이고 부모님이라는 믿음이 내게 확고하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분명해 질 것입니다.
어려운 이웃들에게 봉사한다. 보시한다. 하는 단순한 마음이 얼마냐 진실해야 되는지를 우리들은 배워갑니다. 우리의 많은 이웃들은 불자들의 따뜻한 마음과 손길을 원하고 있습니다. 우정으로 함께 나누고, 부모 형제로 함께하는 마음이야말로 보살의 생활일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언제 어디서냐 이웃에게 먼저 인사를 나누고 반겨 드립시다. 모든 이웃들을 이해하고 사랑할 때만이 본래 갖춘 인간의 덕성이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을 한번 살펴 보십시오. 너무나도 많은 이웃들이 우리의 손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병원만 해도 황색카드로 입원한 환자의 경우 보호자가 거의 없습니다. 간호원의 손이 마치지 못하는 일거리가 너무나 많습니다. 보육원에도 갱생원에도 자비의 손길을 함께 나눌 사람을 원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만이 우리들 곁을 떠나 버려져 있어야 합니까? 왜 그들만이 특정한 지역 속에서 가난과 질병과 무지 속에서 굴욕을 받아야 합니까? 인간은 혼자서 존재 할 수 없듯이 혼자만의 행복은 거짓입니다.
이제 나환자촌을 찾는 우리 회원들은 전문인은 아니지만 익숙한 자세로 고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으며, 반창고를 붙이는 간호에 숙달되어 있습니다. 그분들의 반갑고 밝은 표정 앞에서 우리들은 어느새 형제처럼 더 잘해주지 못함을 부끄러워할 뿐입니다.
가장 존귀함이 인간이라면 인간을 위한 일이야말로 가장 존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송광사 스님, 신행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