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스승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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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담는 오솔길 - 진명
2002년 11월 249호
한줄기 가을비가 뿌리고 지나가고 바람이 차가워지고 있다. 세기를 더하는 바람결은 채 물들지 않은 낙엽을 땅으로 쏟아 놓고, 이 비는 가을을 몰아가고 겨울을 우리 곁에 성큼 데려다 놓을 것 같다. 요즘의 날씨는 이처럼 예측할 수 없이 변화가 많다. 가을에 폭우가 내리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밤에 뇌성과 번개가 번뜩이기도 한다. 이런 자연의 표정이 발달이라는 미명하에 도시화, 산업화를 거쳐온 우리에게 큰 스승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한 인간이 태어나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유형의 스승을 만난다. 그 스승은 자연일 수도 있고 무정물無情物이 될 수도 있다. 세상을 향해 마음만 열어 놓는다면 말이다.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는 티베트인들에게 정신적인 지도자이자 스승인 ‘달라이 라마’의 뜻을 보면, 달라이는 몽골어로 ‘큰 바다’라는 뜻이고 라마는 티베트어로 ‘스승’이라는 뜻이다. 즉 ‘넓은 바다와 같이 큰 덕의 소유자인 스승’ 이다. 어떻게 보면 살아가면서 이런 넓은 바다와 같은 스승이 있다는 것은 큰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수행자들에게도 더없이 중요한 것이 있다면 좋은 스승을 만나는 일일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들에게도 스승은 대단히 중요한 존재다. 집을 지을 때 주춧돌에서 대들보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듯이 음악을 만드는 데도 마찬가지다. 작곡가나 연주자들은 음악 이론과 이해, 그리고 기술적인 면까지 여러 스승의 지도를 받게 된다. 사람에게 한 번 습득된 것은 다시 바꾸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좋은 스승을 만나는 일은 더없이 중요한 일이다. 더불어 정치나 경제, 사회적인 상황이 더 큰 스승으로 자리하는 시절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가 중에 한 사람인 ‘세르지우 첼리비다케(Sergiu Celibidache)’는 참 어려운 시대적인 상황을 격어온 음악가이다. 수행자처럼 삶을 인내한 음악가, 그의 삶을 통해서 스승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세르지우 첼리비다케는 1912년 7월 11일 루마니아 모라비아의 야시 근처 작은 마을인 로만에서 다소 권위적이고 빈틈없는 아버지와 피아노를 다룰 줄 아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음악가들과는 다르게 어린 시절 어머니가 피아노를 다룰 줄 안다는 사실 외에는 음악적인 배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불가에서 보면 음악과는 깊은 숙연이 있었던 것이다. 첼리비다케는 어린 시절 레슨을 통해서 배운 피아노 연주하기를 매우 좋아했고, 상당히 자질도 있었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모범생이었고, 과거 거장들이 남긴 작품을 탐닉하며 작곡 기법과 악보에 새겨진 음표 이상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도 당연히 늘어났고, 작곡에도 상당히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첼리비다케가 정치가가 되기를 원했다. 첼리비다케가 18세 때 음악가가 되고 싶다고 아버지에게 고백했을 때 아버지의 반대는 심했고, 그로 인해 아버지와의 의견충돌이 갈등으로 심화되었다. 그래서 결국 첼리비다케는 집을 뛰쳐나갔고, 이후 두 번 다시 자신의 부모를 보지 못했다.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루마니아의 수도였던 부카레스트로 갔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터리였기에 엄청나게 고통스럽고 비참한 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발레 수업의 반주 피아니스트로 일을 하며 돈을 벌었고, 하루 일당으로 생계를 꾸려가야 했던 날도 많았다. 결국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자신의 안락한 생활을 버린 이 시절의 고생은 첼리비다케의 음악에 대한 엄격한 고집을 형성하는 데에도 단단히 한몫 했다고 본다.
베를린에서 음악수업을 받던 시절 첼리비다케는 몇 명의 스승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첫 번째 스승은 자신을 베를린에 올 수 있도록 도움을 준 티센이고, 다음은 후고 디스틀러라고 한다. 또 발터 그마인들 교수의 기교를 드러내지 않는 성실하고 깊이있는 지휘법 강의에서도 상당히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피아니스트가 되고자 했던 첼리비다케의 야심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정도로 강한 인상을 심어준 것은 다름 아닌 제네바상을 수상한 미켈란젤리의 1938년 콘서트였고, 당시 마에스트로 푸르트벵글러가 이끌던 베를린 필하모닉의 콘서트는 신비롭고 영감에 가득 찬 소리로 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고 한다. 또 첼리비다케는 니콜라이 하르트만과 에두아르트 스플랭거로부터 철학 교육도 받았고,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1938년 티베트불교 큰스님이었던 탄 춘 스님과의 만남이었다. 이 만남은 그에게 불교의 해탈과 초월의 의미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은, 인생의 전환을 가져다 준 사건이기도 했다. 그 스님과의 만남 이후 그의 음악세계에 불교관의 반영이 깊게 드리워졌다. 탄 춘 스님은 그의 삶과 음악세계에 있어 어느 스승보다 큰 스승으로 자리했던 것이다.
나치 전범으로 낙인 찍혀 연주활동이 금지된 푸르트벵글러의 후임으로 베를린 필을 맡고 있던 레오 보카르트가 한밤중에 점령군 병사로부터 총격을 당했으며, 작곡가 안톤 베베른 역시 비슷한 일을 당해 베를린 필의 지휘대에 설 수가 없었다. 독일 출신으로 적당한 인물이 없는 상태에서 이방인이었던 첼리비다케에게 베를린 필을 지휘할 수 있는 숙명적인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당시 첼리비다케는 불과 33세였고, 그의 데뷔는 첼렌도르프 발트 호숫가의 야외 콘서트에서 이루어졌다. 첼리비다케는 그의 우상이었던 푸르트벵글러를 베를린 필에 복직시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고, 결국 푸르트벵글러는 1947년 반나치 위원회 앞에서 선서를 하고 다시 베를린 필의 지휘대에 설 수 있었다. 그 후 1952년까지 이 두 사람은 함께 베를린 필을 이끌게 되었다. 첼리비다케는 천성적으로 논쟁을 좋아했고, 완고한 성격 탓에 몇몇 음악가들과 불화가 빈번했고, 그로 인해 푸르트벵글러보다 상대적으로 활동을 많이 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용의주도한 정치력을 갖고 있던 카라얀의 등장은 첼리비다케의 음악 인생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사건으로 기억된다. 푸르트벵글러 급서 후 베를린 필의 가장 강력한 후임자로 예정되어 있던 첼리비다케는 화려한 이력과 사업가의 수완까지 겸비한 카라얀에게 밀려났다. 그러니까 베를린 필이 카라얀을 선택한 것이다. 이 사건은 첼리비다케가 유럽 음악계의 중심에서 벗어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는 주로 이탈리아와 스칸디나비아에 머물렀고, 여러 나라 유수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으며 1962년부터 10년간 스톡홀름 방송 오케스트라에서 주로 활동했고, 70년대 초반 다시 독일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특히 슈투트가르트에서 상당기간 활동했다. 이 시절의 슈투트가르트 방송 교향악단은 첼리비다케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수혈받은 악단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그리고 1979년 뮌헨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 음악 감독으로 눌러앉는다. 뮌헨 필에게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첼리비다케 자신에게도 그의 마지막 17년을 보낸 고향과도 같은 오케스트라가 바로 뮌헨 필이었다. 그는 죽기 전 바로 몇 주 전까지도 시들지 않는 열정으로 오케스트라를 가르치고 지휘했으며,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프랑스 파리에서 1996년 8월 14일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젊은 시절 어떤 매체들에서는 “첼리비다케가 과대망상증에 빠져 있고 거만하고 고집불통이고 괴팍하다”고 혹평을 했지만 그는 인생을 사랑했고,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었고 인위적이지 않았으며 한없이 자상한 스승이기도 했다. 그가 음악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고집은 제자들이 연구에 깊이 몰두할 수 있게 하는 촉진제가 되어 주었다. 음악 또한 인생처럼 만들어지고 소비되며 결국 사라지게 된다고 말했던 첼리비다케에게 어렵고 험난했던 시대상황은 큰 스승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나라와 나라를 전전하며 음악과 좋은 스승에 목말라 있던 그에게 그의 작곡을 인정해 주었던 스승 티센은 첼리바다케가 이 시대의 마에스트로로 자리를 굳히기까지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