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경주 남산 천룡사 터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영지 影池 - 김대식 2002년 11월 249호
경주 남산 천룡사 터 경주 남산에서 가장 좋아하는 절터를 꼽아보라면 나그네는 천룡사 터를 듭니다.
남산에서 제일 높은 고위봉 아래 아늑한 터가 널찍하니 펼쳐져 있어,
까막눈일지라도 한눈에 명당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삼층탑, 귀부, 석등 대석, 석조石槽, 맷돌 따위 신라 시대 유적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고
또 고려시대의 연화대석들도 여럿 있습니다.
절터 주변에는 여염집이 몇 채 옹기종기 동네를 이루고 있습니다.
남산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철 따라 바뀌는 좋은 풍광을 놓아두고 옛 유적만 말한다면
산이 억울해 할 것입니다. 천룡사 터는 특히 그렇습니다.
풍광 좋고, 유적으로 볼거리도 많은 천룡사 터는, 경주 지역 유적답사 단체들이 매우 아끼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들 단체가 천룡사 터를 찾을 때에는 ‘달빛 기행’으로 한껏 멋을 부립니다.
대개 보름날 안팎으로 일정을 잡습니다. 동남산에서 느지막하게 출발해서 칠불암을 거쳐
산을 넘어오는 코스가 가장 흔한데, 칠불암 위 능선에 서면 이미 달이 떠 있게 마련입니다.
그 달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능선 길, 산허리 길을 걸어서 천룡사 터에 이르면,
그야말로 별유천지別有天地 비인간非人間이 되는 것입니다.
몇 해 전 가을, 나그네도 천룡사 터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달빛이 부리던 요술을 구경한 적 있습니다.
달이 어루만지듯 삼층탑을 비추자, 탑은 여느 때의 무심한 돌덩이에서
천년 세월을 간직한 하나의 은은한 신비神秘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나그네는 일어나던 길로 삼층탑을 찾아갔습니다.
탑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말쑥하니 여느 때의 모습으로 되돌아 와 있었습니다.
나그네는 못 다 들은 사연이나 있는 듯이 탑 주변을 서성였습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속삭이는 듯한 기척에 고개를 들었습니다.
멀리 서산 위에 달이, 질 듯 말 듯 걸려 있었습니다. 밝아오는 하늘 속에 애잔하게 떠 있던 달은 고워라,
작별 인사를 하려고 그 때까지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천룡사 터는 그런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