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고인의 공안公案을 지켜본다고 하는 것은 바로 고인의 언구 상에서 의심하는 탐구적인 태도를 말한다. 당말唐末에는 이 같은 조사의 고칙공안古則公案을 공부하는 숙제로서 혹은 성취한 수행의 정도를 검증하는 척도로 삼는 경향이 있었다. 당말에서 오대의 혼란된 시기를 살았던 법안문익法眼文益(885~958)이 쓴, 당시 수행승들의 병폐를 10가지로 나누어서 경책하는 《종문십규론宗門十規論》에는, 당시의 납자들이 선대의 공안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옛 스님들은 (도를 위하여) 산을 오르고 바다를 건너면서 생사를 피하지 않았다. (수행에) 한 번의 전환을 이루는 (옛 조사의) 기연機緣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으면, 일로 삼아 반드시 결택決擇하여 분명하게 하는 것을 귀중히 여겼다. 그래서 참과 거짓의 기준이 되고 인천의 안목을 이루었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종지를 높이 제창하고 진실한 가풍을 널리 떨쳤다. 선대의 논의를 인용하여 따져 묻고 깨닫지 못한 공안으로 채찍질했다. 만일 수행을 거치지 않고 고금을 억측으로 단정한다면, 그것은 마치 검술을 배우지 않고 억지로 태아의 보검으로 춤을 추는 것과 같다.
이것은 열 개의 경책 가운데, 여섯 번째이다. 여기에 의하면 당시의 납자들은 송 태조(960~976)가 나라 건립하기 전에 이미 옛 조사의 기연인 공안을 공부의 길잡이로 삼았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옛 조사가 도에 들어가는 <기연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으면>, 그것을 <일로 삼아 반드시 결택하여 분명하게 하는 것을 귀중히 여겼고>, <공안으로써 공부의 길을 채찍질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부하는 이들 가운데는 불조의 공안상에서 의심하지 않고 억측으로 단정하는 것으로써 만족하는 경향도 있었던 같다. 원오悟가 <조사의 어구에서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통이라>고 말하고, <백수자栢樹子, 수미산須彌山, 끽다거喫茶去 같은 조사의 공안도 모두 풀이나 나무에 달겨붙는 도깨비 정령들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공부태도를 염두에 두고 한 발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의심을 화두의 중요한 핵심으로 파악하여, 화두를 하나의 공부법으로 정착시킨 것은 바로 남송의 대혜종고의 공헌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만 가지의 의심이든 다만 하나의 의심이다. 화두 위에서 의심을 타파하면, 천만 의심이 일시에 무너진다. 설사 화두를 타파하지 못했더라도, 그 화두 위에서 의심과 더불어 겨누어 가라.
만약 화두를 버려버리고 문자상에서 의심을 한다든지, 경전의 가르침에서 의심을 일으킨다든지, 옛 조사의 공안상에서 의심을 일으킨다든지, 일상 번뇌 속에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은 모두 삿된 권속이다.
위 편지 내용에서 중요한 것은 중국의 간화선 사상사에 중요한 두 가지의 의미를 첨가했다는 점이다. 하나는 화두의 본질을 의심으로 파악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설사 의심을 타파하지 못했다고 하여도 그 화두의 의심과 더불어 (주체적으로) 밀고 가는,> 말하자면 화두를 수행의 한 양식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먼저 <천만 가지의 의심이든 다 하나의 의심이고 화두에서 의심을 타파하면, 천만의 의심이 일시에 무너진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대혜가 말하는 화두의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원오가 말한 <일구를 뚫으면, 천구 백구가 일시에 뚫린다>는 법문의 ‘일구一句’라는 용어를 ‘의심疑心’이라는 낱말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천만 가지의 의심도 그것이 참된 의심이라면, 결국은 하나의 구, 곧 일구에 대한 의심이기 때문이다.
화두란 온갖 종류의 다양한 의심이 하나의 의심으로 통합된 의심이다. 즉 대혜에게 있어 화두는 ‘하나의 집중된 의심 덩어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의심에는 수많은 종류가 있을 수 있다. 일상 생활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일 수도 있고, 경전의 가르침이나 이해되지 않는 문자에서도 문득 생겨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혜가 의미하는 화두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발적인 사량분별에 기초한, 아니면 지적인 호기심의 발로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의심은 사량분별의 일부이기 때문에, 사량분별을 타파하는 집중된 의심 덩어리라 할 수 없다.
하나로 집중된 의심은 개인의 가슴에 내재된 일구이다. 만약 궁극을 지향하고 있는 일구가 다만 저기 선종사에 객관적으로 던져져 있다면,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실체이거나 하나의 기호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일구가 의심으로 개인에게 내면화될 때, 그것은 비로소 실존의 문제가 된다. 그럼으로써 개인의 삶 속에서 사량분별을 끊어내는, 살아 있는 칼날이 되고 불꽃이 된다.
위의 인용문에서 다음으로 주목되는 점은 <옛 조사의 공안에서도 의심을 일으키는 것도 삿되다>고 한 점이다. 공안은 그 개수를 따지자면 천만 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의심은 하나의 화두로 귀착된다. 그러므로 개인의 내면에 자리잡은 화두는 오직 한 개일 수밖에 없다. 옛 조사의 공안들을 조사해 보고 이해하고자 하나, 그 속에서 주체적으로 자기 실존의 문제로서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지식을 첨가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혜는 당시 사대부와 납자들이 조사의 공안을 과거시험 과목처럼 각 칙을 암기하고 분별로 공부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의심 없는 단순한 공안집의 병폐를 통절하게 느꼈다. 그래서 마침내 스승의 저술인 《벽암록碧巖錄》을 불태워 버렸다.
대혜에 의해서 간화선이 확립되었다고 평가한다면, 그것은 곧 선문답의 언구에서 집중된 의심을 일으키는 그 자체를, 깨달음에 나아가는 수행의 한 형태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선문답으로서의 공안과 개인의 내면 속에 의심으로 자리잡은 화두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물론 대혜는 공안과 화두라는 용어를 구별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혜에게 있어 조주의 무자無字는 <삼백육십의 골절과 팔만사천의 털구멍으로> 이루어진 의심의 덩어리로 개인의 가슴에 각인되어 살아 있는 구(活句)로서 존재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중국 선종사에서 ‘조주의 무자’는 그냥 저기에 공안의 일부로 놓여 있을 뿐이다. 어쩌면 문답의 형태로서 단순한 잉크 자국이고, 지나가는 언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혜가 발견한 무자無字는 <뚫고 지나가야(透過)> 하는 선종의 과제로서 분명하게 방법론적인 자각을 수반한다. 말하자면 <역대 조사와 더불어 함께 손을 잡고 눈썹을 맞대고 같은 눈으로 보고, 같은 귀로 듣기 위해서>는 밤낮으로 내걸어 탐구해야 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특별하게 화두를 공안과 구별하여 정의할 필요가 생겨난다. 즉 화두는 ‘선대의 고칙공안에 대한 주체적인 자기 의심’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은 깨달음에 나아가기 위한 ‘방법적 의심’으로 이해된다. 만약 공안에 의심이 없다면, 그것은 지나가는 선문답 정도로,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순수하게 의심이 있다면, 그것은 집중된 불꽃이고 온갖 사량을 잘라내는 칼날로서 커다란 의심의 덩어리가 된다. 그런 까닭에 몽산덕이蒙山德異는 <큰 의심이 있는 곳에, 큰 깨달음이 있다>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