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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권위 와 대중적 인기를 볼모로 한 환상과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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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혜묵 1989년 08월 90호
해인지에서, 누군가가 법당에 숨어들어 불상을 메다꽂고 난도질한 뒤, 욕설을 써 놓고 달아났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쇳덩어리 불상은 그런 광포함의 직접적인 대상이, 명백히,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무엇을 향해 위험을 무릅쓰고 그러한ꡐ힘ꡑ을 사용하였을까. 그 격정과 폭력의 직접적인 대상은 도대체 무엇인가. 불상이라는 물질덩어리가 표현하는 불명확한 대상은 무어라고 불러야 하는가. 그것은ꡐ불교ꡑ인가. 나는 그곳에서 부당한 편가르기를 본다. 우리 편이 아닌 상대편에 대한 비겁한 힘의 행사를 본다. (난입자의 칼과 임제의 칼을 혼동하는 佛子는 없을 것이다.) 이런 유형의 글을 쓴다는 것은 언짢은 일이다. 소모성의 편가르기 놀음은 결과에 상관없이 양편 모두를 파괴시킨다. 내가ꡐ그의 글에 대한 글ꡑ을 써달라는 제의를 받고 처음 느꼈던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내가 이미 어느 한 편에 소속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같은 편가르기는 그에게서 비롯한 것이다. 그의 글에서 소위ꡐ불교ꡑ를 그의 바깥에 두었기 때문이다. 우연하게도 나는 그 바깥편에 끼어 있게 되었다. 그것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뤄졌다. 이러한 편가르기는 매우 작위적인 것이며, 천상 글을 쓰는 그의 태도에서 기인한 것 같다. 그렇다고 모든 잘못이 그의 태도에서 시작한다고 뒤집어 씌우려는 것은 아니다. 덮어씌우기는 직업적인 정치가들의 힘겨루기에나 통용되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그와 비슷한 힘겨루기에 말려들었다는 생각은 든다. 나는 이제 우리편의 가슴에 꽂힌 비수를 뽑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변명하거나, 설득하거나, 주장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제부터 내가 쓰는 갖가지 언어나 논리는 편가르기와 힘겨루기에 저항하는 수단일 뿐이다.
이런 유형의 편가르기가 몹시 어색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 편의 입장에 반듯하게 서기 위해(우리의 적에게 효율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해) 양편의 선을 분명히 가르는 일에서부터 시작했다. 나는 곧(상대편은 고려하기도 전에) 우리 편을 한정짓는 일이 불가능함을 알았다. 우리의ꡐ우리ꡑ는 본래 있었던 우리가 아니라, 상대편이 상대화함으로써 비로소 규정된 ꡐ우리ꡑ였기 때문이다. 나는 먼저 상대편이 그어놓은 선을 살펴야 했다.

㉠ 客化된 佛敎-말과 거짓
나는 그의 글을 읽었다. 이런 글을 억지로 읽어야 한다는 것은 고역이다. 나는 잡학사전을 싫어한다. 의무감에서, 하던 일들을 미뤄 놓고 그 글을 읽었다 그의 상대는ꡐ불교ꡑ였다. 그는 ꡐ불교ꡑ에 대한 구조적 이해를 선지자처럼 베풀고 있었다. 문제는 분명해졌다. 그의 상대역은ꡐ불교ꡑ였으며, 나는 그 테두리 안에 들어 있었다 나는 그렇게 편이 갈렸지만 이 글을 쓰기로 결심함으로써 그의 편가름을 인정했다. 다행히ꡐ불교ꡑ는 나의 일상사였으므로 나는 새삼스레 심사숙고할 필요도 없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그런ꡐ불교ꡑ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 편도 없다고, 잘못된 편가르기, 나의 상대역은 환상의 파노라마였다. 나는 이런 체험을 숱하게 치뤄 왔다. 언제나 나는ꡐ불교ꡑ에 대해 무언가 열심히 떠벌리는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다. 그 와중에서 나는 그들이 아무것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ꡑ그렇다기보다, 눈에 띄는 이것, 저것을 되는 대로 줏어 섬길 뿐이라는 사실을 터득했다. 그들은 그냥 이것, 저것을ꡐ불교ꡑ라고, 또는ꡐ불교ꡑ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의 글에서도 그 말은 문맥에 따라, 무척 다양한 의미로 씌인다. 그것은 때로는ꡐ인간 싯달타가 깨달은 진리ꡑ이며,ꡐ연기론적 실상의 총체적 구조ꡑ이다. 그것은ꡐ민중이 주인인 佛家ꡑ,ꡐ조직화된 종교, 또는 그 집단ꡑ,ꡐ불교라는 이름으로 현현하는 상황들의 총체ꡑ,ꡐ특정교학 또는 교리체계ꡑ,ꡐ구조적 이해의 대상ꡑ,ꡐ부디즘의 경험체ꡑ 등등으로 씌인다. 나아가ꡐ울긋불긋 단청된 문화재의 해골ꡑ이다가, ꡐ미륵보살반가사유상ꡑ이 되기조차 한다. 때에 따라서는 가령ꡐ儒家가 아닌 것ꡑ,ꡐ기독교가 아닌 것ꡑ처럼 상대적으로 정립되기도 하는데, 마치ꡐ 청와대 앞은 경복궁ꡑ,ꡐ청와대는 경복궁 뒤ꡑ같은 넌센스로 보이기도 한다. 나는 이 지겨운 추려내기를 계속할 여가가 없다. 하지만 이 헤아리기도 어려운 서로 다른 의미들이 하나의 단어에 연관되어, 하나의 논리를 형성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의미들이 지칭하는 단일한 대상이 있을 수 있을까
그는 말한다.ꡒ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ꡓ이게 무슨 소린가 무얼 어쩐다는 말인가. 답은 간단하다. 그곳에는 ꡐ나ꡑ와ꡐ본다ꡑ만이 있지ꡐ불교ꡑ는 없다. 그는 자신의 경험이나 이념을 통해 이것, 저것을 ꡐ보고ꡑꡐ불교ꡑ라고 이름지으며, 그 이름을 통해 그 경험, 이념을 투사한다.ꡐ나ꡑ와ꡐ본다ꡑ가 만들어낸 환상이다. ꡐ나의 봄ꡑ속에 내장되어 있던 이데올로기가 특정한 사건들에 부딪혀 ꡐ불교ꡑ라는 너울을 쓰고 표출된 것이다. 그것은 분출한다. 그는 끊임없이ꡐ그는 본다ꡑ는 행위를 과시한다. 나는 이 책의 첫장을 넘기는 순간 단하나 하고 싶었던 그의 주장을 간파했다. 그는ꡐ나는 본다ꡑ고 절규하고 있었다. 그것은 큰 에너지를 가진 몸부림이었다. 매우 억압된 그 기운이야말로 우리 편에게 편가르기와 힘겨루기를 느끼게 했던 진짜 원인이었다. 나는 그의 절규가 이유가 없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ꡐ대상이 없는 절규ꡑ였다. 그러나, 이런 분석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질 않는다. 문제는 그 글에ꡐ힘ꡑ이 있다는 사실이며, 이 분석은 그에 맞설 만한ꡐ힘ꡑ이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그 힘에 관한 것이다.

㉡ 꽃따먹기 놀이-ꡐ진짜 불교ꡑ와 주도권, 힘에의 의지.ꡒ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ꡓ ꡒ꽃 찾으러 왔단다…ꡓ, 이 놀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글은 우리가 늘 해왔던 이 꽃따먹기 놀이를 제안한다.ꡒ불교는 중들의 것이 아니다. 조선 민중의 것이며, 조선의
지식인들의 …이 땅의 스님들이 무어라고 행패를 부리던지 간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조선의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의무가 있다. …불교는 이 땅의 것이요, 그대들의 ꡐ것ꡑ이 아니다.ꡓ 우리가 ꡐ그대들ꡑ인 한 그는 꽃을 찾으러 우리집에 온 것이다. 그래 놀아보자. ꡒ무슨 꽃을 찾으러 여기까지 왔느냐.ꡓ 이제 그가 ꡒ무슨 꽃ꡓ을 제시할 차례다. 그는ꡐ진짜 꽃ꡑ을 내세운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이해할 수 없었던ꡐ불교ꡑ의ꡐ구조적 본질ꡑ을 민중을 위해, 한국 지식 대중들의 구조적 이해를 위해, 승려들에게 지식사회학을 가르치기 위해,ꡐ불교ꡑ의 대중화, 민중화를 위해 대리인의 자격으로(이것은 볼셰비키즘인가, 마오이즘인가) 꽃을 찾으러 온 것이다.
그러나, ꡐ무슨 꽃ꡑ 논쟁, ꡐ진짜ꡑ 논쟁에 앞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 놀이의 결말이 ꡐ가위바위보ꡑ라는 실력행사로 끝난다는 것이다. 淨化나 法亂이 모두가 이러한ꡐ무슨 꽃ꡑ
ꡐ진짜ꡑ를 앞세운 실력행사로 치뤄졌다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일까 그의 발상과 이승만, 전두환의 논리는 너무도 흡사하다ꡐ불교는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진짜 불교는 이런 것이다. 불교와 너희는 이러저러해야 한다. 棒喝ꡓ오, 위대한ꡐ진짜ꡑ여, 구조의 보편이여! 그러나 그ꡐ진짜ꡑ는 총구에서나 나온다. 과연 정치를 떼어 놓고 순수종교를 논할 수는 없다.(누가
그러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그의ꡐ모든 종교현상은 정치적ꡓ이라는 명제의ꡐ모든ꡑ을 믿지 않는다. 그러한 신념이야말로 순수한 종교성의 발로이다. 하물며ꡐ정치적ꡑ에 대한 보편적 근거가 告子風의 食色性따위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나는ꡐ불교적ꡑ 분쟁의 가장 더럽고 치사한 측면이 늘 소유권, 주도권, 그리고ꡐ진짜ꡑ,ꡐ정통ꡑ 싸움이었음을 되새긴다. 나는 그 논리의 배변에서ꡐ힘에의 의지ꡑ를 읽는다. 그리고는 니이체나 파시즘, 氣質之性을 주장한 程明遭의 中華思想을 연상한다. 그의ꡐ진짜ꡑ 논리는 폭력, 재력, 매력 중에 과연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 구조라는 수단의 양면성-無礙와 本質主義
그는ꡐ불교에 대한 구조적 이해ꡓ를 제시한다. 그의 글 속에는 두 개의ꡐ구조ꡑ가 있다.(세밀하게 따져 보면 더 많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말이야말로 금세기를 대표할 만한 유니크한 용어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그 말은 다의적이고 이해하기 어렵다.) 그는 대상을 해석하고 이해하는ꡐ방법ꡑ으로써 구조를 활용한다. 그는 그가 채택한 증거나 사건, 사료 들을 구조적으로 분석한다. 그의 구조는 二分的구조다. 보편/특수,본질/현상,본/말,자/태 主/客, 필연적/역사적, 공시적/통시적, 주체성/토착성, 다양성/고유성, 서양/통양, 국제성/토착성 등등, 나아가 세수도 하고 수염도 깎는 깨끗함/인간의 구저분함까지도, 그는 해석을 위해ꡐ불교를 客化ꡑ한다고 말한다. 그런 전제 아래 채택한 증거들을 분석한다. 그 방법은 그가 그렇게도 비난하는 이분법적 구조다. (이 점에서조차 그는 철저히 二分的으로 사고한다.)ꡐ증거→해석→구조→귀납→실체를 구성ꡑ이라는 알듯 말듯한 그의 논리는 변중법이라는 말로 명확해진다. 그는 변증법적 종합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해석의 수단이었던 이분구조의 어려움은 변증법으로 해결된다. 아, 변증법(그것도 정확한 정의 없이 애매하게 쓰이는), 그것은 만병통치약인가. 그에게는 또 하나의ꡐ구조ꡑ가 있다.ꡐ과거, 현재, 미래의 영원한 진리체를 통한 동일구조ꡑꡐ사건과 사건 사이에 내재하는 보편적 진리체ꡑ ꡐ보리수와 봉은사 사이의 진리의 동일성ꡑꡐ인간이라는 보편자ꡑꡐ보편적 인간화ꡑꡐ몸ꡑꡐ氣ꡑꡐ불법의 영원성=연기론적 창구ꡑꡐ보편사관 이것은 그가 말하는 ꡐ진짜ꡑ의 진짜인 근거이다. 그는 이러한 용어들을 마구잡이로 사용하지만, 그 말의 해명을 위해서는 한 페이지도 할애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표현들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머릿속을 쪼개볼 생각은 없다 나는ꡐ현대철학은 본질주의와의 긴 투쟁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가 비난하는 데카르트의 ꡐCogitoꡑ와그의ꡐ몸의 현전성과 보편성ꡑ을 구별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마르크스의 본질주의적 요소를 비판에 밀려 ꡐ구조ꡑ라는 말로성공적으로 변호했던 알뛰세를 연상할 뿐이다. 그의ꡐ구조ꡑ를ꡐ理ꡑ나ꡐ性ꡑ이라는 전통적인 용어로 치환해 보면 그의 이론이 전통적인 이기론쟁과 굉장히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보다는 그가 화엄교학의 無礙를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事→事相→體事→理性→事→無優의 논리 구조는 그의 사고방식에 매우근접해 있다. 그가 대승교학의 相卽관계를 변증법이라고 간단히 넘겨 버리는 것을 봐도 그렇다. 아무튼 無礙 따위의 해석되지 않은 용어로 치장한 보편이나 본성은 지독한 것이다 자신의 독창성을 그토록 절규하려면 먼저 과거의 언어구조에서 벗어나 자신의 독창적인 언어부터 갖추던지 그 애매한 선이라도 염두에 둘 일이다

㉣ 지식사회학-사이비 과학과 부르즈와 문화주의
그에게 있어 ꡐ본질구조ꡑ로 나아가는 수단은ꡐ지식사회학ꡑ이다.(그의 목적은 이것을 승려에게ꡐ교육ꡑ하는 일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여기에 대해서도 별다른 설명을 남기지 않는다. ꡐ종교현상을 사회적-역사적 지평의 맥락 속에서 교섭하는 진리로써 客化시켜 이해하는 것ꡓ이라는 귀걸이, 코걸이 식의 애매한 정의보다. 그 이름의 친숙성이나 분석과 종합의 논리에서 뒤르켕이나 만하임 따위를 연상할 뿐이다. 그는 단지 그가 발견하는 사료 속에서 공시적 구조를 찾아낼 뿐이다. (나는 왜 그가 자기 이론의 출처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는지 모르겠다 한문해석학, 기철학 따위로 섞어 놓지만, 그것이 부정직한 전술임에는 틀림없다.) 그가 들어내는 것은 신학이론에 대한 장황한 나열이나. 고작해야 엘리아데의 아류 정도이다. 오히려 그는 70년대 한국의 신학자들이 해왔던 종교현상학의 이론과 결과들을 많이 활용한다. (나는 그런 유형의 종교학을ꡐ사이비과학ꡑ이라고 규정한다. 그들이 말하는 ꡐ무교ꡑ라는 Archetype은 건전하지 못한 힘겨루기의 의도에서 나온 전혀 비과학적인, 근거없는
신념이다. 그가 인용하는 무교→도교→불교→유교→기독교, 따위의 도식이야말로 꽃따먹기식 주도권 싸움을 터무니없이 단순화시킨 것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런 도식들이 반제 민족주의의 시류를 타고 널리 상식화되어 왔다는 점이다.)
나는 왜 이런, 전혀 다른 기초 위에서 형성된 가설들이 학문의 이름을 띠고 불교해석의 전제로써 교육되어져야 하는지 알 수 없다. 학문을 가장한 그 이념들은 소위ꡐ自內的ꡑ인 것도 아니려니와, 기독교 중심주의, 서구우월주의, 인종차별주의의 편견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도, 양식도 있고 권위도 있는 서양 사람들 자신에 의해 까발려지고 있다. (그 극단적인 형태로 소위 Post-structualism이나, Post--modern-ism群에 속하는 진보적인 서구 학자들의 작업을 언급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리라 믿는다.) 그 따위 구조는 보편도, 영원도 아닌 편의적, 전략적 단순화에 불과하다.
그러한 학문, 보편적 인간학을 주창하는 사람답게 그는 문화와 교육을 신선한 처방으로 제시한다. ꡐ절깐에서 피리 불고 국악으로 찬불가 만들고, 교육이 아니면 불교는 살 길이 없다.ꡓ 진짜배기 교육, 과연 영원한 물음표, 문화와 교육의 힘을 이야기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해봐야 입만 아픈 이야기. 그를 우편향이라고 낙인찍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문화와 교육에 몸바쳐 온 지 무릇 기하이며, 문화와 교육에 피보고 죽은 사람은 무릇 기하이더뇨. 나는 그 고리타분한 논쟁을 재탕, 삼탕할 기운이 없다.

㉤ 호국불교의 재해석은 혁명불교-원숭이 똥구멍과 백두산
소위 그가 주장하는 호국불교에서부터 혁명불교에로 이르기까지의 논리 전개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ꡒ원숭이 똥구멍은 빨개→빨가면 사과…ꡓ 따라서 원숭이 똥구멍=백두산이라는 논리를 연상하게 된다. 물론 이 동요 속에도 엄격한 규칙과 논리, 그리고 명중성이 있다. 이러한 규칙과 논리를 그의 기철학에서는 구조적 인식의 논리라고 하는지는 몰라도 우리 주변에는 보다 쉽고 상식적인, 쓸모 있는 방법들도 많다. 지저분한 똥구멍에서 위대한 민족의 산, 백두산이 도출된다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지만 까다로운 일이기도 하다 각 단계의 명제들은ꡐ우리가 잡학이라고 부르는ꡑ 너절한 증거들로 입증된다. 각 단계는ꡐ 연역ꡑ의 관계로 표현되어 있지만 귀납을 통해 입증된다. 우리는 보통 정치적인 연설문이 이런 형식으로 씌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교육받은 연역의 확실성에 최면 걸리고, 좌충우돌하는 박학에 어리둥절해서 성급한 일반화는 놓쳐 버리게 마련이다. 그래도 눈에 보이는 커다란 약점은 공약으로 내 걸린다. 이러한 논리는 강력한 선동력과 세뇌력을 갖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말하는 기운의 정체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아직도 Brain-drained된 상태에 있는 것인지 Brain-drain의 전술을 완벽하게 마스터하고 있는 것인지 구별할 수가 없다. 하지만 결과는 똑같이 사악하다. 그는 그의 독자
를 지식대중이라고 표현하지만, 여타 베스트셀러물이 그렇듯이 그들이 Popular(미국식 상업주의의 산물인)한 문화결핍증 환자들인 점에서 볼 때 그 선동과 세뇌력은 무시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가령 미륵반가사유상에서 시작해서ꡒ불교는 禪이 아니라 생각이다. 무식과 무명의 지랄 云云ꡓ 간단한 결론으로 도달한다. 과연 오, 백두산이다. 나는 그런 결론들을 다 반박할 생각이 없다. 다만 뱃속이 불편한 것은 그처럼 뛰어난 한문 해석학자가 왜ꡐ사유ꡑ, ꡐ선ꡑ,ꡐ생각ꡑ따위의 개념들이나 자신의ꡐ논리ꡑ에는 그 해석학을 적용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3,000년 가까이를 오르내리며 옛말과 요즘말, 전문용어와 일상어들을 마구잡이로 혼용한다. 그런데도 하필ꡐ바람ꡑ이라는 말은ꡐ음운학ꡑ이라는 과학을 볼모로 잡고 엄청
난 평지풍파를 일으킨다. 그 빈 공간에는 똥구멍과 백두산이라는 논리의 비약, 명증성을 빙자한 선동, 힘의 과시가 있다.

㉥ 禮論과 無禮함
ꡒ남의 집 제사에 배 놓아라 감 놓아라 하지 말라ꡓ는 속담이 있다. 家家禮라는 말도 있다. 자신이 자랑하듯 뼈대 있는 선비 집안의 후손이며, 위대한 철학자인 그가 이 속담의 뒷면에 담긴 철학적 의의를 모를 리가 없다. 남의 집 제사에ꡒ이래야 하느니 저래야 하느니ꡓ 걸고넘어지는 것은 피를 부르는 일이다. 위의 속담들은ꡐ피ꡑ를 경고한다. 禮나 名分은 상충하는 힘들의 얼굴이다. 그것은 힘을 사용하거나 통제하는 수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예론은ꡐ힘들의 묵은 질서ꡑ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댓가가 따랐다. 속담은 무책임하고 무분별한 예론을, 그에 따르는 통제할 수 없는ꡐ힘의 넘침ꡑ을 경고하는 말이다. 그것이 ꡐ무례하다ꡑ는 말의 속뜻이다.
나는 그의ꡐ진짜불교론ꡑ을 일종의 예론이라고 평가한다. 전통적으로 예론에서는 해석된 현실과, 해석된 사료 속에서 발견된 보편성과의 합치를 문제삼는다. 소위, 역사적으로 해석된 所以然과 所當然의 理가 판단의 기준이 된다 그의 글에서는 공시, 통시의 해석이 이를 대신한다. 과학에서 보편이 도출된다? 나는 그러한 헤묵은 거짓명제, 理나 구조, 보편적 해석에 관심을 기울이고 싶지 않다. 그것은 이미 힘의 반영, 정치적인 주장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도덕한 힘은 오히려 가장 유용하게 그러한 가치 중립의 사이비 보편성을 가장하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예론과 권력에 학문이 유착할 때 우리는ꡐ어용ꡑ이라는 표현을 쓴다. 지식인은 자신의 학문적 예론에 끝까지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독재자나 착취자와 논쟁할 필요가 없다. 독재와 착취가 그곳에 있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적으로 삼을 뿐이다.ꡐ불교ꡑ라는 환상적인 이름을 걸고, 그의 글과 유사한 모습으로 계속되어온 진짜배기 논쟁, 꽃따먹기 놀음, 그리고 그에 따른 부도덕한 힘의 난무는 참으로 지긋지긋한 것이다.
나는 감히 예언할 수 있다. 무지하고 무례한, 무책임한 엉터리 예론이 다시 한번 불교계에 폭력의 파란을 불러 오리라는 사실을.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예론은 맹랑한 것이다. 방외자의 객관성을 빙자한 ꡒ남의 집 제사론ꡓ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그 같은 유령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우리 시대에 ꡐ진짜배기ꡑ는 더 이상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ꡐ진짜배기 불교ꡑ의 환상이 아니다. 부당한 힘의 사용을 통제하는 방편, 삶에 변화를 가져오는 구체적인 가르침의 수행을 위해 우리는 노력할 뿐이다.

㉦ 인식의 전환-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공자 앞에서 문자 쓰듯 그에게 철학이론을 강의할 생각은 없다. 그 또한ꡐ불교ꡑ에 대해, 선사들에 대해 이런 말만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가 뜻하는ꡐ인식의 전환ꡑ이 ꡐ왕정→민주ꡑ라는 도식에만 적용되는 것인지는 몰라도, 선만큼, 선사들만큼 그와 유사한 어떤 것을 宗으로 삼는 사랍들을 본 적이 없다 그 一路向上의 宗이 회향되지 않는다 하여 그들에게 그것을 훈계하다니, 그것이ꡐ운 밟아 漢詩 짓는 사람ꡑ의 文字般若인가. 가르침, 선의 세계를 한 마디로 단정짓기에 그의 인생역정은 너무 짧다. 아니 근세 이후 그것에 쏟아온 우리 역사의 노력의 양은 너무 적다. 모르는 세계는 모르는 채로 놔두어라. 그곳에도사람은 있다.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자기 자리와 영역이 있다. (이런 표현에 양자역학 云云의 해석, 곧 사족을 달지 말았으면 한다. 희론은 소용없다.) 우리는 동시에 두 장소에 편재할 수 없다. 스스로에 의해서건, 남에 의해서건 자리매김올 강요당한다는 것은 어색한 일이 아니다. 그의 머릿속에ꡐ보편ꡑ이 들어 있다 해서 아무 곳에나 들어갈 수는 없다.
그가 보여준 노력파 능력은 감탄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ꡐ보편ꡑ이 아닌ꡐ특별남ꡑ에 대한 감탄이었다.) 제왕의 힘을 거절한 통속의 거지철학자를 ꡐ leftꡑ라고 하지 않듯이,ꡐ인식의 전환ꡑ을 진보의 척도로 삼지는 않는다. 그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등의 몇 가지 사료를 ꡐ유별나게ꡑ 해석하여 중거로 제시한다. 대승불교니, 원효 따위를 들먹이지만 미흡함은 알았던지 ꡐ불교학점ꡑꡐ양식있는 세계의 학계ꡑ를 과시하면서 미래를 공약한다. 나는 그가 대승불교나 원효에 대해 무엇을 아는지 모른다 다만ꡐ통각의 통불교ꡑ운운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비난하는 무식쟁이 지성사나, 불교학의 개설서쯤의 재탕이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우리는 원효라는 영웅이나, ꡐ運ꡑ 따위의 그야말로 정치적일 뿐인 환상을 오랜동안 주목해 왔으며 그 정체를 까발리기 위해 오늘도 원전들과 씨름하고 있다 우리에게 원효는 아직 먼 곳에 있다. 내게는 원효를 걸고 넘어지는 놈들은 얼추 사기꾼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버릇이 있다. 원전들을 접한 이래로 내가 배울 수 있었던 유일한 교훈은 ꡐ우리에게는 지금
시간이 필요하다ꡑ는 사실이었다 그에게도 시간은 필요하다. 그 같은ꡐ연설문ꡑ에 앞서 그가 해야 할 일은 그가 미래로 넘겨 버린 바로 그 일, 원전에서 시작하는 일이었다. 시간은
일방적으로 흐르는 것이다. 앞의 것을 뒤로 넘기고, 누가 감히 시간을 거슬러 원효나 싯달다와 마주앉을 수 있겠는가. 실제적인ꡐ전환ꡑ은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흘러가는 시간을 기다리는 중에 벌어진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역사라고 부른다. 역사에 앞서, 시간을 거슬러 史觀이 먼저 존재해야 하는 그런ꡐ뒤바뀜ꡑ을ꡐ전환ꡑ이라고 해야 할지, 나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 東大강연회 유감
우리는 동양학과 동양고전의 해석작업에 관한 그의 고무적인 역할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가 그에게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새로운 교학운동에 있어서도 그러한 역할이 긍정적으로 도움이 될 수도 있는 비전이었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classicist로서의 그를 존경한다. 그렇지만 그는 누구나 할 수 있는(그 자신은 아니라고 하지만, 물론 그 아니면 이 정도로 무지하고, 무례하고, 몰염치하면서도 이 정도의 대중적인 선동 효과를 가질 수도 없겠지만) 간편한 비판, 현상의 잡다한 쓰레기 더미를 선택했다 (선택된 현상은 이미 사실이나 현실이 아니다. ꡐ봄ꡑ이란 이미 이데올로기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화석화된 것이다. 그 쓰레기 더미에서 그는 고결한ꡐ보편자ꡑ를 이야기한다.) 문제의ꡐ견고한 핵ꡑ은 가려져 있고, 늘상 하소연과 함께 유보된다.
나는 우편향으로 낙인 찍힌 그를 초청했던 동대학생회와 그 사건을 그야말로ꡐ불교ꡑ에의 환상과 ꡐ교학의 역사적 한계ꡑ라는 촛점에서 넘겨 짚어 본다. 그들이 행동하기에 ꡐ불교ꡑ는 너무나도 거추장스러운 것이었고, 교학은 해석되지 않은채 시간의 책먼지 속에 묻혀 있었다. 아직도 그들은ꡐ행동의 단계ꡓ에 미치지 못하는ꡐ해석의 단계ꡓ에 좌초되어 있었다. 그들에게는 사실ꡐ불교ꡑ를 거부할 힘도 없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별 생각없이 해석학의 고수라고 자처하는 그를 타임머신으로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해석을 문제 삼지 않고, ꡐ불교ꡑ를 문제삼았다. 아니 그 같은 명목 아래 검증되지 않은, 공인되지 않는, 정치적으로 위협받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했다. 그러한 행위는 학자로서도, 교육자로서도, 지식인으로서도, 문필가로서도, 선배로서도 당당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한 과도함을 역사가 그에게 요구한다고 투정한다. 다른 곳의 역사라면 난 잘 모르겠지만ꡐ불교ꡑ라는 환상 아래서 역사는 그에게 그러한 과도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ꡐ불교ꡑ라는 만만한 환상을 걸고 문화니 어쩌니 그야말로 ꡐ우리나라의 구타를 좋아하는 교양무식꾼ꡑ처럼 굴지 말기를 충고한다. 동대학생회는(그들의 의도는 이해할 만하다) 현시점에서 별 도움도 되지 않고, 비생산적이고 퇴폐적인 스캔달만 야기하는, 그리고 변화를 갈망하는 불교인들의 숨은 에너지를 쓸 데 없는 분열로 소진시켜 버리는 그러한 강연회 따위는 이제는 집어치웠으면 한다 나 또한 그가 비판한 불교계의 악폐들을 변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런 악폐들은 그 근원을 이루다 밝힐 수 없을 정도의 안팎으로 뿌리가 깊은 것들이다. 그것은 단말마적인 울부짖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다. 기존 불교계에 대한 그의 촉각적 비판에서 스트레스 해소성 쾌감만을 얻는 게 목적이라면, 그러한 비현실적, 서구브르즈와적 문화주의, 보편사관 따위의 관념적 본질주의, 인기 있는 평론가 타입의 독설, 사이비과학이 갖는 마약적 중독성을 경고한다. 그런 사이비 이론의 도움으로 중심핵의 제거없이 지말적 전술들만을 수정해 감으로써 불교와 현실, 사회, 민중, 이교의 대립적 관계들을 고정화시켜 버리고, 그의 반정립으로 기성 승가의 봉건적 악폐가 더욱 강고해져 갈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ꡐ불교ꡑ를 이용한 편가르기와 힘겨루기의 가장 치사스런 놀음에 동대가, 진보적이어야 할 학생그룹이 왜 앞장을 서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제 이 지겨운 글을 끝내야 하겠다 마지막으로, 그의 독설과 스캔달을 좋아하는 문화지식대중인 그의 팬들이 이 글을 읽는 기회가 있다면, 기억해 주기 바란다 우리 시대에는ꡐ불교ꡑ도ꡐ진짜배기ꡑ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 따위 꽃따먹기, 편가르기 주도권 싸움은 젊은 佛子들의 가슴 속에서 더 이상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로움이나 변화는 조급함 속에서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직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편집자 주 : 이 글은 김용옥 씨가 동국대학교 불교학생회에서 주최한 강연회에서 강연한 내용을 다시 한 권의 책으로 엮은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에 대한 논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