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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갈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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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앞의 잣나무 - 동봉 1989년 08월 90호
이 세상에는 길도 많기도 합니다.
산에는 돌길이 있습니다. 바다에는 뱃길이 있습니다. 공중에는 달과 별의 길이 있습니다.
강가에서 낚시질하는 사람은 모래 위에 발자취를 냅니다.
들에서 나물캐는 여자는 방초(芳草)를 밟습니다.
악한 사람은 죄의 길을 쫓아갑니다.
의(義) 있는 사람은 옳은 일을 위하여 칼날을 밟습니다.
서산에 지는 해는 붉은 놀을 밟습니다.
봄 아침의 맑은 이슬을 꽃 머리에서 미끄럼탑니다.
그러나 나의 길은 이 세상에 둘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님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그것은 만일 님의 품에 안기지 못하면 다른 길은 죽음의 길보다 험하고 괴로운 까닭입니다.
아아! 나의 길은 누가 내었습니까.
아아아, 이 세상에는 님이 아니고는 나의 길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의 길을 님이 내었으면 죽음의 길은 왜 내셨을까요.
만해스님의ꡐ나의 길ꡑ

부처와 조사(祖師)가 다르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다름아닌 ꡐ길ꡑ의 시설과 파괴다. 즉 부처는 길을 닦아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는 한편, 조사는 그러한 길들을 모조리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ꡐ길ꡑ이란 무엇인가. 한문으로 표기하면ꡐ도(道)ꡑ이다.ꡐ길(道)ꡑ이란 한자의 파자(破字)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다른 모든 것을 다 젖혀두고라도 우선적으로〔首〕나아가야 하는 길〔之〕이다. 그것이 도다. 이른바 부처님이 제시한 여덟 가지 바른 길〔八正道〕이다. 길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즉 도는 목적이 아니라 방법이다. 그것도 가장 빠르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수단이며 방법이다. 그런데 이러한 길을 부처님은 제시하고 조사는 파괴하는 것이다. 조사들의 경우는 부처님이 제시한 길을 보고 이를 일러 평지풍파를 일으켰다고 몰아세운다. 스승이 제시한 길을 그의 제자가 마구 짓밟아 뭉개버리다니,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운문문언(雲門文限)이 이런 패륜아와 같은 짓을 저질렀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운문선사( ?~949)는 설봉(雪峰)의 제자로서 운문종(雲門宗)의 시조(始祖)다. 그의ꡐ일방타살(一棒打殺)ꡑ이란 화두(話頭)는 너무나 유명하여 제방의 납자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운문선사가 어느 날 대중들에게 일렀다. ꡒ세존이 처음 태어나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두루 일곱 걸음을 걷고, 눈으로 사방을 돌아보며 ꡐ하늘 위와 하늘 아래서 오직 나홀로 존귀하다ꡑ하였다. 만일 당시에 내가 그러한 장면을 목격했더라면, 한방에 때려눕혀 개에게 던져 주어 먹게 했으리라. 그렇게 하였더라면 천하가 평안할 것을.ꡓ평지풍파라니,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이냐. 다른 모든 중생들이 부처님의 출현을 고대하였고, 그리하여 온 천하가 부처님의 교화에 큰 덕화를 입고 있는데, 하물며 운문 자신도 부처님의 제자로서 먹물 옷을 입었고, 자아발견과 자아실현을 위한 길에 나서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러한데도 그렇게 함부로 입을 놀려도 되는 것인가. 하지만, 운문이 이와 같이 아주 커다란 오류를 범하고 있었음이 틀림없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말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고 따라갔던 제자들에게도 허물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운문, 그는 불향여래행처행(不向如來行處行)을 실천한 위인이다. 부처님이 제시한 길대로 가는 이는 얼핏 보면 부처님의 제자로서 매우 타당하고 올바른 것 같지만 기실은 잘못된 길을 가는 경우가 많다. 누구나 자신의 길이 있으므로 자기의 길을 가야 한다. 그리하여 누구나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완전한ꡒ자기ꡓ가 되어야 한다. 남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그대로를 노출하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한 자아의 성취,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아직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자기만의 세계, 자기만의 미지의 길을 가는 것이다. 수십 수십억의 인류가 수만년을 걸어간 길이 저마다 다르듯이 우리가 걸어갈 길도 저마다 다르다. 그러므로 인생에 있어 정도는 없으며, 그 윤곽만 남아 있을 뿐이다.
부처가 제시한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나 파괴된 조사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나 허물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부처의 말씀은 무조건 사구(死句)요, 조사의 말씀은 무조건 활구(活句)라는 인식부터 버려야 한다. 부처님의 말씀에 의거한 선(禪)은 무조건 여래선(如來禪)이니 하열한 것이요, 조사의 말씀에 의거한 선은 무조건 조사선(祖師禪)이니 위대한 것이라는 생각은 옳지 않다. 모두다 사구다.

어느날 운봉이 석두회천(石頭希選)에게 물었다.
ꡒ어찌하여야 도에 계합하오리이까?ꡓ
ꡒ나도 아직 도에 계합하지 못하였다네.ꡓ
ꡒ그렇다면 마침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ꡓ
ꡒ그대가 도(道)에 속은 지 얼마나 되지?ꡓ
ꡒ……!ꡓ
우리는 무엇엔가 매달려 허우적대며 살아왔다. 그런데 조사가 나타나 그 매달려 있던 단 하나의 선을 잘라버렸다. 그때부터 모든 속박은 사라지고 인간은 각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은 부처가 제시한 길에 얽매이지 않고서 아주 자유로운 자기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보라. 실제는 진정한 자아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까뭉개진 조사의 길을 가는 것이다. 아니 까뭉개진 조사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길에 집착하여 목적지는 아예 생각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길에 엎드려 있지 말고, 빨리 달려가야 하는 것이다. 조사의 수단은 악랄하다. 후학들로 하여금 자기가 제시한 길에 붙박히도록 하는 매력을 풍기며 유혹하고 있다. 그러고는 다시 그 길마저 뭉개어 버린다. 무섭다. 거기에는 부처도 조사도 없다. 닥치는 자는 모두 살신실명(殺身失命)한다. 예수는 무어라 했던가. ꡐ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ꡑ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 자신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일 따름이다. 누구도 예수가 제시한 길대로 가면 자아의 길을 잊어버린다. 예수, 그도 부처님의 제자이면서, 부처님이 가르쳐준 숱한 교리를 가져다가 자기의 이름으로 등기한 사람이다. 다른 어떤 조사보다도 뚜렷하게 자기의 길을 걸어간 자다. 그런데 다 같은 조사(祖師)이면서 예수는 부처의 땅, 부처의 재산, 부처의 교리를 가져다 스승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자기의 이름으로 등기했다. 따라서 기독교는 불교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자, 이제 우리 다시 한 번 눈을 돌려 바라보자. 우리는 진정 자기의 길을 가고 있는가. 자기가 곧 부처될 자격을 갖추고 있음을 망각하지는 않았는가. 운문은 마른 똥막대기조차도 부처라고 했고, 작약의 꽃도 청정법신이라 했다. 한낱 주장자가 용이 되어 건곤(乾坤)을 삼켜 버린다고 하였다. 하물며 우리들은 부처님이나 조사처럼 똑같은 생리적 구조를 갖고 있음에랴. 무엇이 부족하여 제 길을 가지 않고 부처나 조사의 언구(言句)에 매달려 허우적대고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숱한 세월을 길〔道〕에 속아 살아왔는가. 그러나 분명 운문이, 조사들이 부처의 길을 뭉개버리고 각자의 길을 가려 한 것처럼, 우리들 모두도 조사들의 길을 뭉개버리고 각자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아, 어쩌겠는가, 뭉개는 것도 하나의 방법〔道〕이니, 뗏목을 버리고 어찌 강을 건너겠는가. 강을 건너고 나서 뗏목을 버려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부처가 제시한 길이든 조사가 뭉갠길이든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 아니면 예수처럼 홈치는 길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구태여 뗏목 타고 저쪽의 언덕 아름다운 세계에 도달하는 것만 옳다고 생각할 건 없잖은가. 바로 이쪽의 언덕, 우리가 살고 있는 추한 세계를 아름답고 찬란한 세계로 꾸밀 수도 있지 않겠는가. 영원한 자아의 보금자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