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사(輝宗史)를 통털어, 특히 중국 불교사에 있어 마조의 출현은 실로 엄청난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 이전의 선사(禪史)는, 달마가 양무제와의 면담 이후 크게 위축된 심정으로 소림굴로 은거한 이래, 별로 괄목할 만한 면모를 보여 주지 못했다. 물론 많은 선종 문헌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와 같이, 육조 혜능에 이르기까지 부처의 심인(心印)이 면면이 이어진 것만으로도 초기의 선사(輝史)가 갖는 의미는 실로 지대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실상 그 내용은 아직도 ꡐ벽관바라문(달마대사를 가리킨다)류의 인도적인 사변주의와 선민의식(選民意識)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사변에서 일상으로, 선태에서 응화(應化로 선풍의 면모를 일신했다는 것-바로 여기에 마조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다.
이후 마조의 선풍은 요원의 불길처럼 중국 대륙을 휩쓸었다. 그의 문하에는 백장, 남전, 대매, 염관 등 실로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운집하여ꡐ대기(大機)의 용(用)ꡑ을 연마했으며 세상에서는 그 일문(一門)을ꡐ강서종ꡑ또는ꡐ홍주종ꡑ이라고 일컬었다. 나아가 마조의 문하는 신라의 입당구법승들을 통하여 우리나라에도 깊이 뿌리를 내리기에 이르는데, 일찍이 나말여초(羅末麗初)의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무려 여덟 산문이 그의 직계 제자들을 사사한 당시의 신라 유학승들에 의해 개산되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동리산 태안사(樞裡山 泰安寺)도 이 구산선문의 하나였다.
단비 속의 88고속도로
아직도 나는 위의ꡐ88고속도로ꡑ라는 차길 이름을 대할 때마다 웬지 심사가 자꾸만 떨떠름해진다. 우선 시각적으로 그것은 일련 번호에 익숙한 군사 문화의 반영인 듯한 생각이 들어서 보기에도 민망할 뿐만 아니라 그렇다고ꡐ팔팔ꡑ이라고 소리라도 내어 읽을라치면-하기야 언필칭 고속도로니까 이 길에 들어서는 차마다 모두가ꡐ팔팔ꡑ뛰지 않아서는 안되겠지만-애초의 그 거룩한(?) 공사 명분이 전혀 되새겨지지 않는, 길 이름치고는 별로 신통치 않다는 기분이 들어서이다. 겸사 겸사 들렀던 해인사를 떠난 것은 좀 어중간한 시간인 오전 열시 반경이었다. 초여름으로 이어지는 봄 가뭄에 모내기 걱정이 태산인 저 아래 들녘의 질곡과는 달리, 차길 아래의 홍류동 계곡은 여전히 가야산 그림자를 한아름 안고 잘 씻긴 바위 사이를 굉음으로 흐르고 있다. 가야를 지나면서 그 동안 뻑뻑했던 고막이 순간 탁 터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차는 야로 인터체인지를 지나 88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하늘은 잔뜩 찌푸린 채였고 멀리 올려다 뵈는 가야산 꼭대기에는 삿갓인 듯 구름이 걸려 있다. 말마따나 그동안ꡐ팔팔ꡑ을 타고 다닐 일이 별로 없었던 탓인지 나는 계속 차창 밖의 풍경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실 요즈음 세태에 비추어보아도 도회와 농촌 그
리고 윗녘과 아랫녘 사이에 무어 그리 크게 다른 점이 있을까마는, 그래도 경상남도의 북부 지역을 관통하는 ꡐ88ꡑ연변의 살림살이는,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말도 있기는 하지만, 웬지 기름지다는 느낌이다. 아직 훼손되지 않고 온전히 남아 있는 산자락이 그만큼 후덕해 보여서일까? 지리산이 가까워서인지 아니면 낮게 드리워진 하늘 덕분인지, 겹겹이 웅크리고 있는 산들의 면모가 갈수록 웅장하고 풍성하다는 생각이 든다.
종이 구겨지는 소리와 함께 귀가 다시 멍멍해지는 것이, 이제 지리산을 넘는가보구나. 그런데 창 밖에는 지리산만이 아니었다. 후드득후드득 차창을 때리는 빗방울이 문득 시야에 어른거리고 있지 않은가! 문자 그대로 단비였다. 산에도 들에도 아스팔트 위에도 온통 스며드는 단비, 남원이 가까워지면서 빗줄기는 더욱 드세어진다. 길가의 불그레한 싸리꽃빛이 빗속에 한층 짙게 묻어난다.
섬진강 굽이돌아
남원 땅에서의 비맞이는 칠월 칠석날의 그것마냥 웬지 좋도 궂도 않은 어정쩡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곡성가는 차시간도 솔찮이 남았고 마침 시장기도 돌던 참이라, 익히 들어 알고
있던 남원의 진수성찬을 맛보려는 요량으로 이곳 저곳 기웃거리며 그럴듯한 식당을 찾아 헤맸던 것이다. 결론은 역시, 어디든 마찬가지이지만, 터미널 부근은 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릴없이 비맞아가며 길바닥을 오르락내리락하는 몰골이 좀 처량도 해서 내친 김에 들어간 집은 마침 머얼건 순대국 집이었다. 이것도 다 복이지 뭐….
때마침 출발을 기다리고 있던 태안사행 완행 버스를 타고 곡성 터미널을 빠져 나온 것은 거의 두 시가 다 되어서였다. 장날도 아닐 뿐더러 평일이라 그런지 버스 안은 텅텅 비어 있다. 잠시 비는 멈추었고 주위의 연봉은 구름에 다소곳이 잠겨 있다. 길가 논에는 채 모를 내지 못한 농부들이 아직도 조금씩 흩뿌리는 빗발 속에서 마지막 모내기에 열심들이다.
곡성읍을 벗어난 차는 이윽고 섬진강 상류의 한 지류인 순자강을 끼고 비에 젖은 아스팔트길을 조심스럽게 미끌어져 간다. 지도를 펴놓고 곡성군의 지형을 살펴보면 이웃 남원군과 이어져 있는 약간의 분지 외에는 군 전체가 온통 산으로 보인다. 그것은 전군의 73.6%를 산지가 차지하고 있다는 통계에 의해서도 엄연한 사실로 확인된다. 산이 깊으면 물도 많은 법 … 그래서 이곳 곡성땅에는 내내 섬진강과 같은 줄기이긴 하지만, 앞에서 말한 순자강 외에도 석압강, 그리고 보성강 등이 곳곳에 수려한 경치를 드리운채 남해로 흘러든다.
그 순자강과 보성강이 한데 만나는 곳인 오곡면 압록리는 섬진강 물줄기
중에서도 경관이 가장 빼어난 곳이다. 아울러 이곳은, 아직 이른 철이기는 하지만, 특히 은어와 은빛 모래사장이 유명해서 여름 한철이면 무려 수천의 인파가 물가를 가득 메우는 장관이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버스는 다시 이곳에서부터 보성강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한다. 일단 석곡까지 가서 되돌아 나온 버스가 마침내 아까 올라가면서 그냥 지나쳤던 강 위의 다리를 건넌다. 그리고 얼마 후 차는 절 아래 주차장에 닿았다.
훤해진 도량 모습
주차장에서 절까지는 약2km. 그 동안 내린 비로 길 옆 계곡물은 하얀 물방울로 용트림이다. 아직도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짙푸른 나무숲 사이를 걸으며 문득 오년 전 처음이 길을 걸었던 기억을 되새겨 본다. 그때도 아마 이맘때쯤이었을걸? 시간은 물론 이보다 일렀지만. 평소 잘 알던 스님을 찾아 태안사를 오르니 마침 공양 시간이었다. 더러는 틈새기도 슬쩍 벌어진, 공양간 아궁이 앞의 두레상 공양은 장마중의 온갖 버섯 요리라-그야말로 산중의 진수성찬이었다. 특히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꾀꼬리 버섯 양념 구이는 아직 그 요리의 공식 명칭도 학계(?)에 정식으로 보고되지 않은 만큼, 문자 그대로ꡐ환상적인ꡑ진미였다. 하지만 잠시 동안의 식탐(食貪)으로부터 벗어나 이리저리 도량을 둘러보면서, 순간 나는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산중 살림이 맑다기로서니, 다 허물어진 저 선방채하며 눈처럼 흘러내린 저 담장꼴임에fi- 그나마 조금 성한 건물이란 것도 1968년, 겨우 이웃 봉서암을 이전하여 건립한 반토막짜리 법당채뿐, 무엇 하나 반듯한 것은 찾아 볼래야 찾아볼 수도 없는 도량의 궁핍함 때문이었다. 더구나 일찍이 선문 구산의 하나로서, 불조의 심인(心印)을 상전하는 선종의 근본 도량으로 개산한 동리산 태안사 선방에 쥐똥만 즐비한 지경에 이르러서야- 그러나 오늘 와 본 태안사는 이미 그 때의 모습이 아니다. 격세지감이라 했던가? 나라 안에서도 몇 안되는 나무다리인 능파교 그 윗길은 차마 자지러질까 살짝이 즈려 밟던 이끼도 고운 산행이었는데, 오늘 길은 다리 못미쳐 훤히 뚫린, 문자 그대로ꡐ신작로(新作路)ꡑ이다. 게다가 절에 들기 전의 빈터에는 저 청량한 분수! 동리산 정상을 담아 안은 연못 위에 잠시 흰구름이 빗겨 지난다. 도량 안으로 들어서니 문득 오른쪽 위의 선방께로부터 힘찬 서기가 느껴지는 것은 웬일일까. 결제 정진에 여념이 없는 금강 선원은 작년에 이미 삼년 결사 대중 스물 두명을 배출했다니, 과연 동리산 선문이 그냥 옛 이름만은 아니었구나! 하지만 수년에 걸친 태안사 불사의 백미는 뭐니 뭐니해도 역시 일반인들을 위한 개방 선방인 ꡐ정중당(爭衆堂)ꡑ의 건립에 있지 않을까?
참선의 대중화를 위해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삼세의 업장이 소멸된다는 말이 있다. 이는 물론 옛부터 출가인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어온 말이긴 하지만, 그 뜻이야 뭇 수행법 가운데 참선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해탈의 길인 동시에 그만큼 어렵고 힘들다는 사실을 암암리에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에게는 무언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남달리 고난에 차았다는 사실을 시위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자하는 자학적 본능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이는 엄연한 현실인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든, 실제로 남보다 많은 기득권을 향유하고 있는 사람일수록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기존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그만큼 더 많은 안팎의 도전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는 불교를 비롯한 지구상의 모든 종교적인 권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들이 파악하고 있는 인간적인 질곡의 모든 원인-탐욕․무명․불순종-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분명히 엄청난 고행이 요구된다. 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만큼은, 효율과 속도에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성과 속 혹은 승속(曾俗)이라는 이분법석 신분에 따른 어떠한 제한도 나는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선방 문고리가 출가인들만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기왕에 보살 선방이라는 이름의 몇몇 공개 선방이 산사에 개설되어 일부 선택받은 할머니들의 노인정(?) 구실이나 하고 있던 부끄러운 현실에 비추어, 태안사의 정중당 개설은 실로 그 의의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남녀노소 그리고 불자든 비불자든, 참선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오시라. 그리고 안방 드나들듯 친근한 마음으로 정중당의 문고리를 한번 잡아당겨보시라.
비 개인 하늘에 무지개만 곱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