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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고봉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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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이윤수 1989년 08월 90호
오륙십년대에 젊은 날을 보낸 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요즈음의 세상을 바라보면서 ꡒ우리 땐 안그랬는데, 요즘 것들이란 쯧쯧…ꡓ하면서 곧잘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는 듯한 표정을 짓곤 한다. 먹고 입고 사는 것이 오늘날과는 바교가 될 리 없는 시절이었겠건만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 시절의 기억들이 훈장마냥 가슴 속에서 빛을 발하는 건 단순히ꡐ보릿고개ꡑ에 대한 아련한 향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건 과학이 발달하고 문명의 이기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잊혀지게 된 ꡐ자연에의 그리움ꡑ 때문이기도 할게고, 인구밀도 세계 최고라는 기록을 과시라도 하듯 물결처럼 밀리는 사람들 틈속에서 ꡐ끈적하게 묻어날 정 ꡑ이 그립기도 한 까닭이겠다.
해인사 극락전에 머무시는 고봉스님은 스무살의 나이로 가야산에 와서 사십 년째 살고 계신데, 옛날과는 영 딴판이 되어버린 승가의 모습을 바라보는 스님은 그 세대의 어른들 대부분어 정신적으로 풍요롭고 건강하게 살았던 당시를 그리워 하신다. ꡒ그땐 분기라는 곳까지 걸어가야 차를 탈 수 있었으나, 자연, 관광객은 커녕 불공드리려 오는 신도들조차 없었어.
하루종일 경내를 돌다가 돌이나 풀섶에 앉아 좌선에 들기가 일쑤였지. 아주 한가롭게 선과 더불어 살았다네.ꡓ지금은 일부러 누더기 두루마기를 구입해 입기도 한다지만 당시는 너나없이 누더기 옷에 떨어진 양말을 밥알로 붙여 신었던 형편에서도 밥 짓다 말고 선에 들 정도의 기막힌 분위기였다면 그때를 잊지 못하는 기분을 이해할 수 있겠냐며 스님은 홍조 띤 얼굴로 묻는다. 그즈음의 절 생활이란 사회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아 ꡐ찢어지게 어려운 가난ꡑ을 푸른 눈빛으로 달래며 살아가는 나날일 수밖에 없었다.
ꡒ오죽하면 조실로 계시던 효봉스님께서 법문을 하시다가 법상 위에서 ꡐ양식이 없다ꡑ며 눈물을 흘리셨겠나? 하지만 그런 고생 속애서도 남들이 공부하는 걸 보면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솟아날 만큼 열기만은 최고였다네.ꡓ
스님은 ꡐ…하지 말라ꡑ ꡐ…해야 한다ꡑ하는 등의 잣대로 선방 분위기가 위축되는 오늘이 그 옛날과 비교되기에 더욱 아쉬울 따름이다.
친구로부터 ꡐ공부해서 도통한 이가 많다ꡑ는 해인사 이야기를 들은 스님은ꡐ나도 삼 년 안에 도통하고 돌아오련다ꡑ하며 굳은 다짐을 하고서 충주의 고향집을 떠나, 산을 넘고 걸으며 묻고 물어서 해인사를 찾아왔다. 남들이ꡐ스님ꡑ하는 것을 ꡐ신(神)님ꡑ인줄로 알 만큼 불교를 몰랐으면서 일주일만에 초발심자경문을 뚝딱 떼어버린 스님이 이처럼 처음부터 어렵잖게 경 읽던 솜씨ꡑ 로 이름나게 된 데에는 한문하는 집안에서 나서ꡐ사서ꡑ정도는 기본으로 마쳤던 것에 그 까닭이 있었다. 행자가 되어 제일 먼저 맡은 일은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일이었다. 도만 닦고 스님은 결코 되지 않겠다던 처음의 마음과는 달리ꡐ선ꡑ에 반해서 영월스님을 은사로 득도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몸으로, 얼굴빛으로 드러나는 선방스님네들의 자세에 감응을 받은 고봉스님은 주위 선사들의 격려와 가르침으로 용맹정진에 힘쓴다.
계를 받은 뒤 얼마 되지 않아 민족상잔의 비극 육이오가 터졌다.ꡐ해인사는 고래로부터 삼재팔란이 없는 곳ꡑ이라며 함께 지키자는 스님들을 뒤로 한 채 은사스님을 모시고서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피비린내 풍기는 전장의 사이사이로 절을 찾아 여러 차례 옮겨다니다가, 마침내 파계사의 성전암에서 영월스님을 모시면서 오래도록 머물게 되었다. 파계사의 대처승들이 전장으로 줄줄이 끌려갈 때도 어찌된 영문인지 스님만큼은 보호를 받기도 했다.
스님은 아마도 ꡐ부처님의 가피ꡑ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에 ꡐ스님ꡑ으로서의 삶을 더욱 사명처럼 여기게 되었다. 이즈음, 홀연히 분심이 일어서, 앉으나 서나 화두와 함께 살면서 잠을 자도 잔 게 아닌 ꡐ경지ꡑ를 맛보게 되었다. 정신이 맑아지더니 한 달쯤 뒤엔 가습속에 큰 덩어리가 콱 얹혔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듯한 환희를 느꼈고 이때부터 고봉스님은 자연과 우주를 새롭게 느끼게 되었다. 수복 후에 해인사로 돌아와 보니 많은 스님들이 희생되고 효봉스님도 타지로 떠나 삭막한 곳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 하나 둘씩 모여드는 도반들과 함께
해인사 강원을 마치고 선원에 들었다. 빨치산의 골 깊은 역사는 비단 지리산에 국한된 일은 아니어서 소백산맥의 한줄기인 가야산의 해인사에도 많은 빨치산들이 거쳐갔다.
ꡒ어느 날인가, 삼백 명이 넘는 빨치산들이 몰려오기에 스님들은 모두 흩어져서 숨었어. 난 짐짓 꾀를 피웠네. 문을 사방으로 열어 놓고는 문 뒤켠에 숨어 있었지. 그들이 잠깐 들여다보고 떠날 줄 알았거든ꡐ그런데 걸린게야. 그네들 앞에서 어찌할까를 고민하다가 멋적게 씨익 웃으며 무조건 ꡐ잘못했노라ꡑ하며 빌었더니, 그들도 웃더군.ꡓ
고봉스님이 맨 처음 해인사에 발을 디뎠을 무렵에는 비구승과 대처승이 법당을 중심으로 동편과 서편으로 나뉘어 살고 있었다. 일주문 앞에서 만난 대처승에게ꡐ도 닦으러 왔다ꡑ고 하자 동편의 가야총림을 일러 줄 만큼, 실제로, 해인사 울타리의 아랫녘, 윗녘에서 저마다 수행을 임하던 비구․대처스님들은 정화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대립없이 잘 어울리며 살아가고 있었다.ꡒ정초에 산림불사가 두 주일 가량 열릴 적이면 비구 ․대처 양쪽에서 번갈아 가며 법문을 했지. 법력 있는 대처스님도 많이 계셨지만 대웅전에서함께 법회도 보고 양쪽 강원에서 소리 높여 경을 읽으면서 선의의 경쟁도 했었거든.ꡓ그러나 정화가 시작되어 양측이 주먹다짐에 소송까지 벌이면서 겪었던 갈등이 지금까지도 꺼지지 않은 불씨로 남아 있는 실정을 보면서 고봉스님은ꡐ화합하는 불가ꡑ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곰곰 생각하게 된다. 정화가 시작되던 시절, 해인사에서 정화의 취지에 동의하는 이들을 규합하기 위해 서명작업을 벌이던 일 때문에 마침내 대처승들에게 쫓겨서 야반도주하여 상경하고야 말았다. 서울에와서도 정화운동에 적극 참여한 스님은 단식투쟁하기를 서슴지 않았고, 추운 겨울날 땅바닥이 녹아 질펀해지도록 조계사 앞마당에 엎드렸다가 겨울 내내 독감으로 고생하기도 했다. 오십사년도부터 시작된 불교정화에 대처측의 종정 만암스님도ꡐ원칙에는 찬동하나 방법론에는 반대한다ꡑ고 발표한 적이 있는데, 고봉스님 또한 정화자체는 꼭 필요한 일이되ꡐ힘을 동원ꡑ함은 그릇된 일임에 생각에 같이 한다. 그것은 관을 등에 업고서 폭력깡패를 동원한,ꡐ싸움을 통한 사찰 장악ꡑ이 무슨 전통처럼 계속되고 있는 현실을 보더라도 그러하다. 이런ꡐ그릇된 유산의 척결ꡑ만은 우리 스님네들 모두가 소매를 걷어부치고서 반드시 해내야 할 첫 번째 임무라는 게 스님의 생각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수행자의 본분이 옳게 강조되어야 한다며 스님은 오랜 경륜을 통해 축척된 생각을 일러주셨다.ꡒ첫째로는 행자들 교육이 선행되어야 해. 그리고 강원으로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할게고 제의하건대, 강원교육도 초등교육과 고등교육으로 나뉘면 어떨까? 각종 번역서를 통해 경전을 공부하고 논의하면서 충분히 학술체계를 세우고 고등교육은 한문 위주로 하여 팔만대장경을 다시 배운다면, 누구든 대중 앞에서 불교를 얘기하고 전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거야.ꡓ한문 위주의 강원교육인지라 한문에 얽매어 교리를 망각하거나, 교리를 이해하려면 한문 해석에 시간을 허비하기 일쑤인 오늘날 교육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이 길은 교과과정이라면, 단지 공부만이 아니라 참다운 수행인으로서의 인격 향상에도 도움을 줄 듯하다. 정화운동에 참여한 뒤에 여든 일곱의 춘추로 거동이 불편하신 경화스님 곁에서 그분의 대소변을 손수 받아내며 삼 년을 지냈다. 노스님에게서 법화경을 공부한 세 해 남짓한 시간은, 육신을 가누지 못하지만 맑고 청정한 정신력을 지니신 고령의 노장께서 많은 교화를 주신 금쪽같은 나날들로 기억된다. 그분이 입적하신 뒤에는 백련암 한적대에 땅을 빚어 토굴을 짓고 생활하다가 몇 군데 토굴로 옮겨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칠십년대 초, 석 달 동안 총무원에서 교무부장의 소임을 보면서 종회의원직을 맡기도 하였다. 아주 짧았던 그곳 생활을 통해 고봉스님은 스스로가ꡐ있을 곳이 아님ꡑ을 느껴 해인사로 내려왔다. 마음이 안 맞고 살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ꡐ발심하면 천하를 겸손하고 그렇지 아니하면 자신이나 잘 닦아 선하게 살라ꡑ는 말씀을 되새기며, 스스로가 후자에 속한다고 판단한 것이다.ꡒ불교가 비판받아도 할 말이 없네. 종권다툼으로 얼룩진 종단과 총무원 스님들에게서 느끼는 실망도 크지. 한편으론 젊은 스님네들에게 거는 기대가 커, 이나라 불교를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스님이 되길 기대한다네.ꡓ크고 좋은 절만 찾지 말고 산골이면 어떻고 농촌이면 어떻겠느냐는 게 스님의 생각이다. 몇 사람만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포교를 위해 우리가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참보시행이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고봉스님은 오륙십년대의 향수를 다시 끄집어 내셨다.
ꡒ그땐 말이야, 큰스님들이 서로 공양주를 하려 하고,ꡐ내가 채공을 맡겠어요ꡑ하며 서로 나섰거든. 삶의 보람이란 오히려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소중한 것들이야. 제일 낮은 지위에서도 최선을 다해 일하는 사람이야말로 부처님의 제자일세.ꡓ누가 팔을 베거나 목을 자르려 하더라도, 웃으면서 불교의 참뜻을 당차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신앙의 자세가 이 험난한 세상을 구원할 종교인의 모습이라고 믿는 스님은 날마다ꡐ내 죽는 날, 얼마나 만족하게 떠날 수 있으랴ꡑ하는 생각으로 하루를 열고 마감한다. 한 다섯 해쯤 전에 해인사 선원의 선원장도 일 년 넘게 맡아 보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그저 절안에서ꡐ무위도식을 일삼는 한주ꡑ라며 껄걸 웃으신다. 사실, 스님의 일과는 너른 터밭에서 채소를 키우거나 찾아오는 손들과 대화 나누는 일을 빼고나면ꡐ참선ꡑ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예순의 나이에 비해 아직도 사십대같은 스님의 용모에서나, 간밤을 꼬박 잠들지 않았다는 스님의 안색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꺄지는 것에서나, 오랫동안의 참선에서 빚어진 고봉스님다운ꡐ경지ꡑ를 보는 듯하다.

글/이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