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승려 둘을 꼽으라면 우리는 선뜻 원효대사와 사명대사를 꼽을 만큼 대중적 인기가 대단한 스님으로 우리는 사명대사를 떠올린다. 특히 임진왜란 때 바람 앞에 등불같았던 나라의 운명을 신기한 갖가지의 도술로 건져내시는 동화 속의 스님은 불교를 신앙으로 가졌던 내 어린날의 자존심 그 자체였다.
스님은 이조 중종39년인 서기 1544년 10월 17일에 밀양에서 태어나셨고 속명은 임응규(任應奎)였다. 그의 가문은 풍천(豊川)에서 대대로 살았던 망족(望族)이었으며 증조부 때 밀양군의 무안으로 옮겨 살았다.
그의 증조부 임효곤(任孝昆)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악원정(掌樂院iE)의 관직을 지냈으며 대구의 수령으로 있었는데 그 당시 밀양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곳에 자리를 잡아 아들 종원(宗元)을 얻었고 종원은 아들 수성(守成)을 낳았으며 수성은 달성 서씨에게 장가를 들어 두 아들을 얻으니 맏아들의 이름이 응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응규, 곧, 사명당이다.
스님은 7세를 전후하여 그의 조부에게서 사략(史略)을 배웠고 13세 때에는 황여헌에게서 맹자를 배웠다. 명종 113년인 15세 때 어머니를 잃고 직지사로 입산 출가하였는데, 그 당시의 고덕 신묵(信黙)스님 밑에서 낙발하여 승이 된 것이 16세 때이다. 출가 이후 3년 만인 18세 때에는 선과(輝科)에 급제하여 그의 재능이 널리 알려졌다. 그때가 명종 때이므로 문정왕후의 후원 아래 보우대사가 불교중흥의 일환으로 선과를 일으켰던 때였으므로 유생들의 시기 또한 만만치 않았다. 선과를 급제한 18세의 청년 학승이었던 스님에게 그 당시의 유생 이산해, 최경창 등은 짐짓 스님의 실력을 시험하기 위해 봉은사에서 스님을 만나자 마자 농을 걸어ꡒ중의 대가리는 둥글둥글한 것이 땀난 말의 불알 같구나〔僧頭團團汗馬囊〕ꡓ라고 하자 스님은 그 자리에서 바로 ꡒ선비의 상투는 길죽한 것이 앉은 개의 자지와 같구나〔儒首犬失尖坐腎〕ꡓ라고 하였다. 스님을 골려주려고 했던 농에 오히려 무안을 당하자, 그 자리에 앉았던 박사암이 서로 도가 다른 사람끼리 서로의 담론을 통하여 배웅을 얻어야지 글자로 사람을 골려 주려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님을 타이름과 함께 스님에게도 유학을 공부할 것을 권하였는데, 이런 저런 일로 하여 오히려 많은 유생들과 교류를 하게 되었다. 특히 20여세나 연장이었던 박사암(朴思華)과 5세 연하인 임자순(林子順) 들과는 자별한 사이였으며, 당시의 제상인 노수신으로부터는 두보의 시를 배우기도 하였다.
스님의 애국충청은 일찍부터 싹트고 있었는데 그의 나이 20세를 전후한 동갑계(同甲契)의 취지인 갑회문(甲會文)에 보면, ꡒ바라건대, 우리는 제각기 서로 저축을 아낌없이 다 털어놓아 천지 성현의 망극한 은혜에 보답하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이것을 소중히 쓸 것이니 영원히 우리는 형제의 인연을 맺으려 한다ꡓ고 하였다.
이처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남달랐으며 교학과 참선에도 남달리 정진하여 대사의 나이 32세 때에는 선종수사찰 봉은사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이를 뿌리치고 묘향산 보현사에 계셨던 서산대사를 찾아뵈었던 것이다. 한동안 이곳에서 서산대사의 지도 아래 안심(安心) 정성(定性)의 선리참구(輝理參究)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그 이듬해에는 가야산 해인사를 비롯하여 남방으로 순행하여 금강산 보덕사, 팔공산 청량산, 태백산 등 구름처럼 물처럼 운수행각하는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1586년, 스님의 나이 43세 때에는 옥천산 상동암에서 정진에 몰두하여 그곳에서 무상(無上)의 대도를 성취하였으며, 그 이후 오대산의 영감사에서 보림하던 중정여립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서 강릉 관아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강릉의 유생들이 평소의 스님의 인품과 덕행을 아는지라 스님의 무죄함을 상소하여 석방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고가 해결된 이듬해에 대사는 다시 금강산으로 들어가 세철을 보내었다.
사명대사가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된 것은 선조25년, 서기 l592년인 49세 때였다. 그는 금강산 유정사에서 난을 당하여 금강산의 모든 사암을 전란으로부터 구하고, 또한 고성군의 백성들을 구출하였다. 그리고 선조의 근왕문(勳王文)과 서산대사의 격문에 의하여 의송병을 이끌고 순안에 이르러 서산대사와 합류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스님은 의승대도장(義增大都將) 승군부 총섭이 되어 승병 이천여 명을 이끌고 대동강을 건너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적토를 차단하는 등 그 전공이 대단하였다.
스님의 나이 50세 때인 선조26년 정월에 있었던 평양성 탈환전의 전과는 놀랄 만한 것이었다. 또한 3월의 서울 근교 노원평과 우곳동 전투에서 왜적과 싸워 크게 전공을 세웠다. 이에 선조대왕은 사명대사의 전공을 치하하여 선교양종판사(輝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선조의 이러한 처사에 크게 반발한 속 좁은 유신들은 상소하기를 ꡒ산승으로 여러 차례 적을 물리친 공이 있다하여 선교양종을 회복하심은 매우 염려가 되옵니다. 나라에 공이 있으면 그공을 치하하는 상전(賞典)이 있는데, 그에 의하지 아니하고 선교양종을 회복하여 임시 내리신 명이라 하더라도 뒷날 나라가 평안할 때 염려가 될 것이오니 거두심이 옳을까 합니다ꡓ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유신들의 상소는 전쟁을 당하여 국가의 존망이 풍전등화인데도 나라를 구하는 해결보다 억불정책과 당리에 치중한 소아병적인 사고방식이 지배하였던 당시
의 상황을 잘 나타내 보이고 있다.
선조는 이와 같이 전쟁을 기피하고 당쟁에 골몰하였던 유생의 무리와 전공을 탐하기에 급급한 관군을 믿지 아니하였다. 마침내 왕은 승군으로 하여금 구왕군(勳王軍)이 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사명대사로 하여금 직접 어가를 호휘하는 둥 선조가 환도할 때, 그 도움이 지대하였다.
공집 이 전에 풍월이 밝았으니(空劫前時風月淸)
소리 없고 냄새 없고 모습마저 없다(無聲無臭無形)
구름을 일으켰다 비를 내렸다 이 누리 뒤엎고 가되(興雲作雨傾天去)
공왕 저 옛 성엘랑 떨어지지 말게 하라(莫隨空王故國城)
- 사명대사의 시 가운데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