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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측(圓測)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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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등불을 이어온 이 땅의 스님들 - 편집실 1989년 08월 90호
원측스님은 신라 진평왕 34년 서기 612년 경주 근처 모량리에서 왕손으로 태어났다.
불과 세 살의 나이로 출가하였으며 15세에는 당나라로 건너가서 법상(法常)과 승변(僧辨) 두 법사에게 불교학의 체계를 배웠는데 두뇌가 명민하여 무슨 말이건 한 번 들으면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특히 어학의 재능이 뛰어나서 중국에 간 지 얼마 안 되어 중국어 및 범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당태종은 그의 명성을 전해 듣고 도첩을 내려 국가에서 공인하는 스님이 되게 하여 장안의 원법사(元法師)에 머물게 했다. 그는 원법사 시절에 비담, 성실 구사, 바사 등 고금의 장소(章疏)를 모두 독파하여 더욱 명성이 높아졌다. 그리고 인도에 다녀온 현장법사가 새로 번역한 유가론(瑜伽論)등의 대 소승경론을 냈을 때, 원측은 마치 나면서부터 이를 안 것처럼 그 뜻을 다 이해하였다. 당 태종은 이에 감복하여 장안 서명사(西明寺)대덕에 임명했다. 여기서 원측은 유식학을 강의하고 현장이 내놓은 새로운 역본(譯本)을 근거로 하여 그에 대한 많은 논석을 저술했다. 그의 저서로 알려진 것은 이십여 가지나 되지만 거의 없어지고 현존하는 것으로 겨우「반야심경찬」1권,「인왕경소」6권,「해심밀경소」10권 등이 있다. 특히 유식학에 뛰어나 당시의 학승 규기(窺基)의 유식학의 편협성을 극복하였으며 그때까지의 모든 유식학의 학문 체계를 정립하였다. 그러나 원측스님은 정통파임을 주장했던 규기파의 질시와 갖은 모함을 받고 장안을 떠나 종남산 운제사에서 산수와 더불어 유유자적하기도 하고 거기서 30여 리나 더 깊은 곳에 묻혀 팔 년 동안 한거(閑居)하는 등 불우한 처지에 있기도 했다. 그 뒤 원측은 당 고종 때에 두차례에 걸쳐 인도 승려들이 가져 온 불경 범본의 번역일에 종사하면서 현장이 입적한 뒤 한 때는 중국의 대표적 학승으로 존경을 받기도 했다. 이 무렵 측천무후는 원측스님을 마치 부처님을 존경하듯이 존경하였으며 696년 불수기사(佛授記寺)에서 84세로 입적하였다. 그는 생애에도 많은 시기와 모함을 받았던 것과 같이 사후에도 오랫동안 망각의 세계에 버려져 있었고 극소수의 학승들 사이에서만 추앙받았었다. 그의 업적이 햇빛을 보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로서 그의 해심밀경소 10권이 유명한 서장대장경의 논부(論部)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발견된 뒤의 일이다. 원측대사의 유식학은 그 이후 신라의 도증(道證) 태현(太賢)등에 의하여 계승되었던 신라 유식학의 반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