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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계단이 마련된 적멸보궁과 자장 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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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의 명보를 찾아서 - 이태호 1995년 03월 157호
이태호 ·황호균

적멸보궁의 근본 도량 통도사를 들를 때마다 사뭇 긴장된다. 절집의 옛스런 모습을 감상할 마음의 여력도 없이 가슴이 탁 막힌다. 종정스님이 계신 절집이어서 그러기도 하거니와 금강계단이 마련된 적멸보궁이어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몸과 마음을 긴장시키는 것은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왔다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와 친히 입으셨던 붉은 비단에 금점이 찍혀진 가사가 정말 지금도 모셔져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요즈음 전국에서 진신사리 친견법회가 열병처럼 번지고 있다. 왜 근래에 들어서 적멸보궁이라 자처하는 곳이 부쩍 많아지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인도, 티벳, 스리랑카 같은 곳을 순례한 승려들이 사리 비슷한 것을 가지고 와서 탑을 세우느라 그 야단법석을 떠는 모양인데. 이들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나 진신사리 신앙의 올바른 정착을 위해서나 확실한 기록을 가진 통도사의 금강계단은 우리에게 화두로 다가온다.
더욱이 통도사가 이 시대에 우리의 주목을 끄는 까닭은 종정 월하스님의 법력 아래 문중의 내분이 없기로 소문난 그런 절 집이기 때문이다.
통도사 산문을 들어서면, 관광 위락시설이 들어선 산문 밖의 소란한 풍경과는 달리, 비교적 옛 모습을 잘 갖추었음에 한눈에 들어온다. 이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차량을 일주문 밖에다 주차시키도록 한 문중 어르신의 깊은 뜻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역대 정부의 자동차 양산 정책 탓에 무슨 행사 날이나 관광 철이면 벌 떼처럼 몰려드는 자가용 승용차를 어떻게 통제하느냐가 무슨 구두선처럼 되어버린 세상이다. 사판 일을 하는 행정스님 들이나 고액 시주 신도들의 편의를 위해 승용차를 법당 부근까지 쑥쑥 들어 가게끔 길을 넓히면서 다른 승용차는 통제하려니 무슨 씨가 먹히겠는가? 통도사 일주문 안에 주차된 차량이 한대도 없음은 방장 스님이 몸소 걸어다니면서 솔선수범하여 이루어진 일이다.
이는 이 시대에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하 하마비下馬碑인 셈이다.
산문 안에 들어서면 절 집 오른쪽을 휘감으면서 흘러내리는 계곡물, 그 계곡 주변 길기에 펼쳐지는 아름드리 노송들의 행렬에서 절 집의 오랜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성보박물의 증축 공사가 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말이다.
통도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 가운데 하나인 불보 사찰로 이름이 높은 절집이다. 우리나라 절집들은 저마다 고유한 종풍을 내걸며 불법을 펼친다. 참선을 통해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선종 사찰이나 지난 번에 소개한 화엄사와 같이 화엄 사상을 내세우는 화엄사찰, 부석사나 금산사와 같이 아미타불이나 미륵불의 세계를 지상에 구현하는 정토 사찰, 관음보살의 세계를 그리는 정토 사찰이나 관음 도량이 그러한 보기들이다. 이러한 사찰의 종풍은 이른바 삼보 사찰이라고 불리는 양산 통도사, 합천 해인사, 승주 송광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통도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친히 입으셨던 가사를 봉안한 불보 사찰로, 해인사는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팔만대장경을 간직한 법보 사찰로, 송광사는 보조 국사 이래 열여섯 명의 국사를 배출한 덕에 승보 사찰로 널리 이름을 떨친 그런 절집들이다.

영취산과 통도사의 이름 유래
한반도의 허리 백두대간은 그 큰 줄기로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과 같은 명산을 만들었다. 여기에 유점사, 상원사, 월정사, 정암사와 같은 명찰들이 들어서 불법을 전하는데 그도 부족했던지 마지막 힘을 다해 낙동강과 동해 사이에 영취산이라는 산 한자락을 내어 불지종가佛之宗家 국지대찰國之大刹인 통도사를 자리잡게 한다. 영취산에 그윽히 안긴 듯한 절집 통도사는 우리나라불교 문화사에서 그 자리가 우뚝하다.
영취산은 해발 천오십 미터의 큰 산이다. 영취산이란 본디 부처님 당시 중인도 마가다국 왕사성 동북쪽의 기사굴산을 의역한 것으로 기사는 취鷲, 굴은 두頭를 의미하며 직역하면 취두산鷲頭山이다. 이는 산 봉우리가 독수리 같다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당시 인도는 조장鳥葬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독수리들이 신기롭게도 사람의 죽을 때를 알고 모여들어 장송이 끝나기가 무섭게 날아와 시신을 파먹으므로 영취靈鷲라고도 한다. 영취산을 독수리가 깃을 들인 산이라는 뜻의 취서산鷲棲山이라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인도 영취산의 빈빌라 굴은 석가세존의 후반생을 보내신 곳으로, 「법화경」을 비롯한 대승경전의 말씀은 대부분 이 곳에서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영취산은 불신佛身의 상주처常住處로 신봉되어 왔다.
이처럼 산 이름은 중인도의 기사굴산을 의역하여 영취산이라 한 것에는 다른 견해가 없는 듯하나, 절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보인다. 곧 “이 산의 모양이 불법을 직접 설하신 인도 영취산과 통한다(此山之形 通於印度靈鷲山)”해서, “승려가 되려는 사람은 모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아야 한다(爲僧者通而度之)” 해서, 또는 “모든 진리를 회통하여 중생을 제도한다(通萬法道衆生)는 의미에서 통도사라 이름했다고들 한다.
그 가운데에서 아마도 영취산에서 유래한다는 해석이 가장 오래된 의미 구조로 보이며, 금강계단 유래설이나 만법회통중생제도 유래설은 아마도 후대에 의미를 심오하게 하려고 덧붙여진 유래설인 듯하다. 이를테면. 금강계단설은 사찰의 근본정신을 잘 말해 주는 해석으로 통도사가 계율의 중심지로서 많은 승려들이 계를 받아 온 데에서 유래하는 것일 터이며. 만법회통 중생제도설은 대승불교의 이상인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의미를 ‘통토’라는 응축된 말로 표현한, 탁월한 발상에서 비롯된 유래설로 보인다.

사리 신앙의 실체와 허상
몇 해 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사리 장엄구 특별전시회를 개최한 적이 있는데, 그 때에 사리를 담는 그릇과 꾸미개(사리장엄구)만을 가지고 전시하는 데에 그치고 말아 좀더 두드러진 연구를 기대하던 많은 이들을 실망시켰다. 이는 그 동안 사리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었던 탓도 있으려니와 사리 자체가 신앙의 대상물로 워낙 민감한 부분이어서 실물 수집이 어려웠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사리는 미술사의 연구 영역도 아니어서 사리 장치만을 가지고도 나름대로 구색을 갖추어 전시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러하였을 것이다. 신비화로 치닫는 사리 신앙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낭패를 입을까 염려되어 주제는 다루어 보지도 못하고 변죽만 올리고 말았던 속내를 짐작 못할 바도 아니었다.
이러던 차에 진신사리 친견법회가 무슨 열병처럼 번지는 현상을 보면서, 내 기필코 ‘사리 신앙의 실체와 허상’에 대해서 말하고 말겠다는 원을 주변에 말하여 왔다. 이는 불법을 올바르게 펼쳐도 의심이 많은 말법 시대에 하물며 삿된 방편을 즐겨 쓰는 분들에 대한 분노이다. 인도, 티벳, 스리랑카 등지를 순례한 승려들이 사리 비슷한 것을 가지고 와서 진신사리 친견법회니 뭐니 하며 법석을 떠는 것은 포교보다는 탑 건립 시주금의 모집에 그 진짜 목적이 숨어 있는 게 아닐까. 이는 그들이 그 뒤에 보여 주는 행태를 보면 좀더 분명해진다. 사리 신앙 자체를 호도하는 이들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도 또 진신시리 신앙의 올바른 정착을 위해서 「삼국유사」에 기록을 둔 통도사를 연구하면 좀 실마리가 풀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이 글을 출발한다.
우리나라에는 예부터 5대 진신사리처로 알려진 곳들이 있다. 양산 통도사의 금강계단, 오대산 중대의 적멸보궁, 정선 정암사의 수마노탑, 영월 법흥사의 적멸보궁, 설악산 봉정암의 적멸보궁이 그 곳들이다. 이 가운데 정암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불사리 및 정골을 봉안한 것이고, 정암사의 사리는 사명 대사가 임진왜란을 피해 통도사의 것을 나누어 봉안한 것이다. 비슬산 용연사에도 사명대사가 통도사의 사리를 분장한 적멸보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자장 율사가 가져온 사리는 황룡사의 구충목탑, 통도사의 금강계단, 울주 태화사의 탑에 나누어 봉안하였고 나머지는 소재를 알 수 없다고 적고 있으나, 일연스님 당시에도 알 수 없던 일들을 하물며 천 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 와서 무슨 수로 밝힐 수 있었단 말인가?
어떤 연유로 모두들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라 자처하게 되었는지 좀더 문헌을 뒤적여 보자.
사리 신앙에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석가모니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 출현한 많은 사리에서부터 사리 신앙은 공식적으로 등장한다.
석가모니께서 구시나가라Kusinagara의 사라쌍수 밑에서 열반하신 뒤 제자들이 당시 사회의 풍속에 따라 유해를 다비茶毘하였다. 다비 후 여덟 가마네 말이나 되는 많은 사리가 출현하자 사리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인도의 여덟 나라가 쟁탈전을 일으켰다. 마침내 도로나徒盧那의 중재에 따라 불화의 사리를 똑같이 여덟 나라에 나누어 주고 저마다 탑을 세우니, 이를 ‘분사리分舍利 또는 ‘사리팔분舍利八分’ 이라고 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신 지 일백 년이 지나 인도제국을 건설한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야소카 왕(서기전 273~232)이 그들 8대 탑을 발굴해 내어 불사리를 다시 팔만사천으로 나누어 전국에 사리탑을 세웠다고 중국의 불전은 전하고 있다. 아소카 왕 때의 불교 중심지였던 산치Sanchi에는 지금도 ‘산치탑’이라 하는 거대한 탑이 남아 있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인도인들이 전쟁까지도 불사하며 신앙의 경배 대상으로 애지중지하던 진신사리가 어떤 경위로 중국과 한국으로 전래되었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중국에 진신사리가 전래된 경위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현장법사가 중국에서 돌아올 때 육신사리 백오십 립을 가져왔고, 또 의정스님이 사리 삼백 립을 가져왔다고 「대당서역기」는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결국 우리나라에 사리가 전해진 경위는 최근의 일을 제외하고는 모두 중국을 통해서이다. 진흥왕 십년(549)에 양나라에서 온 사신들이 불사리를 가져왔으므로 왕이 백관과 함께 흥륜사에서 맞이하였다는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그 뒤 안흥이 진나라에 들어갔다가 법을 구하고 호승 비마라 등과 함께 귀국할 때 능가경, 승만경과 불사리를 가지고 왔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확실하고 신빙성 있는 기록으로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정골과 치아사리 및 사리 백 립을 가져왔다는 내용을 기록한 「삼국유사」를 꼽을 수 있다. 물론 자장 율사의 행적이 워낙 신이神異하고 사리의 취득과정도 다분히 상징적인 얘기들 뿐이어서 이 기록도 결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 뒤로도 어떤 경위로 들어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진신사리를 봉안한 탑들이 많이 세워지게 된다.
사리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이 하나 있다. 1398년에 명나라 사신으로 온 황엄이라는 환관이 왕명을 사칭하며 사리를 요구하였다. 당시 조선의 태종은 셋째 아들인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명 태조가 이러한 왕 책봉을 문제삼지 않을까 고심했는데, 아무런 제지도 없이 책봉사를 보내자 억불정책을 펴던 차에 잘 되었다 싶었던지, 황엄의 부당한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여 전국에서 사리를 모조리 거둬들였다고 한다. 태종은 충청도 사십다섯 립, 경상도 백육십네 립, 전라도 백오십다섯 립, 강원도 구십 립과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삼백세 립을 합쳐 모두 칠백오십일곱 립을 금은함 속에 담아 황엄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로써 공식적으로는 우리나라에 사리가 남아있지 않게 된다.
그러나 그 후 1446년 4월에는 광천사의 사리 열 립을 내원당으로 가지고 와서 봉안하였고, 문종 일년(1450) 7월에는 사리를 깊이 신앙한 효령대군이 사리탑을 조성하기 위해 시주를 얻으려 하다가 관으로부터 경고를 받은 일까지도 있었다 한다. 특히 세조 때에는 사리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이 많이 전한다. 개성의 연복사 승려가 가짜 사리를 진상하는 소동도 벌어졌고, 세조 십년(1464)에는 삼각산 장의사에서 사리가 분신하고 오색구름이 나타났다든지 또 같은 해 오월에는 효령대군이 회암사에서 원각법회를 베푸는데 여래가 나타나고 탑이 방광하면서 사리가 수백 매로 분신했다든지 하는 이적들이 자주 기록에 나타난다. 또 그 사리를 함원전에서 공영하는데 또 수십 매가 분신하여 왕이 크게 기뻐하며 원각사를 세우고 이 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세조는 양평에 용문사를 중창하고 사리탑을 세웠으며, 양주에도 수종사를 창건하고 사리탑을 세웠다. 그리고 양양 낙산사에서 삼십칠일 기도하는데 공중에서 사리 네 매가 떨어지므로 낙산 해안 홍련암에 사리탑을 세웠다고도 한다. 이로써 세조가 세웠다는 사리탑은 수십 개에 이르렀다. 그 뒤에도 사리 신앙은 매우 성행하였으며 오히려 불성에 대한 신앙보다 진신사리에 대한 신앙이 더 깊어 갔던 것이다. 특히 금강계단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고 탑과 단을 쌓아 승려들에게 계를 주는 계단의 역할을 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의 숭배 대상이 되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도 이러한 사리 출현에 대한 소식들이 전해진다. 경남사천 다솔사의 후불탱화 복장낭과 경기 양주 보광사 후불탱화의 복장낭에서도 수십 매의 사리가 발견되었으며, 선산 도리사 부도탑에서도 세존사리 한 매가 출현하였다고 한다. 게다가 불교 성지를 다녀온 승려들이 진짜인지 알 수 없는 사리를 가지고 와서 진신사리 친견법회를 다투어 열고 사리탑을 건립하는 일까지 가세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분명 있다. 가져왔다고 하는 기록보다 더 많은 사리가 등장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거니와, 사리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까지 일으키던 인도인들이 사리를 그렇게 쉽게 내주였을 턱이 없다. 더더욱 현재까지 조사된 우리나라 사리탑이 천오백 기 이상을 헤아리는데 그 속에 모두 사리가 들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사리가 여러 개로 분멸하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신비화시킬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무리한 이야기이다.
수효가 한정된 진신사리에 헛되이 연연해 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인 무한 법사리法舍利를 받들고 되새기는 그런 신앙으로 나아가야 할 터이다. 그럴 때 우리 불교는 공부하는 종교로서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부처님이 이 법석을 알면 얼마나 야단 치실까? 「금강경」에 기록된 이야기 가운데 부처님께서 형상에 연연하지 말라고 수보리에게 말씀하신 대목을 굳이 되새기지 않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이 글이 가뜩이나 부족한 우리나라 불교 신도들의 신심을 더 떨어뜨리게 할지도 모르겠으나 거짓 방편에 불붙은 신심이라면 무슨 대수겠는가. 제대로 된 신심 하나만 있으면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불상이 없다
통도사의 중심 법당인 대웅전에는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다. 대웅전 뒤쪽 금강계단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기 때문에 구태여 허상을 민들 필요가 없어서일 게다. 대웅전은 금강계단의 앞쪽에 잇대어 지어진 배례전拜禮殿 형식의 법당으로 해석된다. 영각靈閣이나 능묘각陸墓閣에서도 이와 비슷한 기능을 발견할 수 있다.
통도사의 대웅전은 불상 대신에 창을 내어 그 곳을 통해 금강계단에 경배하게 하는 내부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본디는 지금처럼 밖이 환히 내다 보이는 창이 아니라 들창이었다고 한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법당 외부 사면에는 각각 다른 이름의 편액이 걸려 있는 점이다. 동쪽은 ‘대웅전’, 서쪽은 ‘대방광전’, 남쪽은 ‘금강계단’, 북쪽은 ‘적멸보궁’으로 적혀 있는 편액은 모두 석가모니 부처님과 관련된 용어들이다. 이 절집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분명히 드러내는 이름들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