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이지만 연평균 섭씨 육칠도의 온난한 기후와 풍부한 물산을 천혜의 조건으로 타고 났으니, 고구려 2대 임금인 유리왕 이십일년(서기 2년)에 설지薛支라는 관리가 이곳을 와 보고 “산수가 심험深險하고 땅이 오곡에 알맞으며 사슴, 물고기, 자라 등이 많아 이곳으로 국도國都를 옮기면 민리民利가 무궁하고 병란兵亂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여 그 이듬해 졸본에서 집안으로 서울을 옮겼으니, 그 뒤로 장수왕 십오년(427)까지 사백이십사년 동안에 걸쳐 고구려의 수도가 되었던 곳이다.
국내성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한 동안 발해가 주둔해 있었으나, 오랜 뒤인 청나라 때에 봉금封禁 지구로 묶이면서부터 사람이 살지 않았고, 봉금이 해제된 뒤인 지금부터 일백 년 전엔 이십여 호에 머물던 인구가 오늘날에는 이십만을 넘는 도시가 되었다.
이렇듯 남의 나라 영토가 된 마당에 옛 고구려의 문물이 온전하게 지켜질 리 있었겠는가. 더구나 문명의 발달이란 미명 이래에서 더욱 마구잡이로 훼손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집안 시 중앙에서 통구와 압록강에 접해 있는 국해성 평면도는 거의 네모꼴인데, 성문은 원래 남쪽과 북쪽에 한 개씩, 그리고 동쪽과 서쪽에 두 개씩 모두 여섯 개가 있었다고 하지만, 1921년에 성을 개수하면서 모습이 변한 것에 이어 1947년에는 중국의 공산당과 국민당이 싸우면서 형체를 찾을 수 없게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돌담을 끼고 성의 위치를 찾아 나서자 어느 성벽은 민가의 축대로 이용되어 아예 집터의 벽이 되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집 앞에 아무렇게 나 널브러져 있는 돌 또한 성벽에서 주워다 놓은 것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또 서쪽 성벽의 남부는 콘크리트로 하천 둑을 쌓고 그 곳에 집들을 지음으로써 성벽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원래 성벽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치推’-중국에서 馬面이라고 함-가 설치되어 있는데(치는 적이 접근하는 것을 정면이나 측면에서 격퇴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네모나 반원형으로 쌓은 곳을 말한다), 이치의 위에 있는 누각을 포루鋪樓라고 하며 성 모서리의 치위에 누각을 세운 것을 각루角樓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이 고구려 성의 뚜렷한 특징인 것이다. 일백칠십오년 당시에만 해도 모두 열네개에 이르는 치의 흔적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국내성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치가 어이없게도 화장실 가리개와 공사장 가건물벽으로 쓰이고 있는 형편이니, 이 마지막 치의 운명 또한 바람 앞에 등불인 셈이다.
칠이 다 벗겨진 국내성 팻말을 뒤로 하고 숙소로 향하여 가는 발걸음은 실로 알 수 없는 비애감과 죄책감,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물질 문명의 발전만을 가속화시키는 경제 논리와, 후손들의 무관심 속에서 고구려의 국내성은 그렇게 사라져 가고 있었다.
겨레의 역사가 아무리 깊고 두텁다한들, 그 문물의 유산이 빈곤하고 물적 증거가 없고서야 무엇으로 역사를 내세울 것이며 또한 후손들이 어떻게 제 나라의 바른 역사를 배울 수 있겠는가.
지난 역사의 유산이 이처럼 이국 땅에 내버려진 채로 국민의 무관심 속에서 방치되어 사라져 가고 있음에서, 제 민족의 역사문화에 대한 무관심이 지속된다면 오늘날의 물질적인 번영 또한 다음시대에 가서는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 것임을 역사는 말없이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