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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 속에서 사라져 가는 국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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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숨결과 풍정 - 이호신 1995년 03월 157호
“여러분은 지금 집밖에서 집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집안集安 박물관에 이어 시내 중심에 있는 국내성 돌담에 오르자 한 학술관계자가 한 우스갯말이었다. 그 소리에 일행 사이에는 웃음이 번졌지만 그것은 실로 잠시뿐이었다.
무관심과 무방책의 이역 땅에서 한 때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은 안타깝게도 이제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되어 있었다. 하루종일 섭씨 사십 도에 가까운 찌는 듯한 더위에 땀방울에 목을 타고 가슴팍까지 흘러내렸지만, 관계자의 연이은 한마디에 더위가 무색하게 전신에서 싸늘한 식은 땀이 엄습해 왔다.
“민족문화유산을 잘 보전하는 길은 그 첫째가 후손을 잘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불과 육십여년 전일 일제 때의 도판「통구通講」와 비교하여 살펴보면, 도대체 지금은 성한 곳이 한곳도 남아 있지 않을 뿐더러 성곽의 위치조차 알 수 없는 국내성 팻말만이 있을 뿐이다. 그 옛날 국내성의 입지 조건은 압록강가에 있는 통구분지通講盆地 서쪽에 위치하여, 동쪽에는 용산龍山, 북쪽에는 우산禹山, 그리고 서쪽 방향으로 흐르는 통구강通構江 너머의 칠성산七星山에 뒷면과 좌우가 모두 산으로 둘러 있고, 앞쪽에는 압록강이 흐르고 있어 그야말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천연 요새로서 자리하였다.

북방이지만 연평균 섭씨 육칠도의 온난한 기후와 풍부한 물산을 천혜의 조건으로 타고 났으니, 고구려 2대 임금인 유리왕 이십일년(서기 2년)에 설지薛支라는 관리가 이곳을 와 보고 “산수가 심험深險하고 땅이 오곡에 알맞으며 사슴, 물고기, 자라 등이 많아 이곳으로 국도國都를 옮기면 민리民利가 무궁하고 병란兵亂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여 그 이듬해 졸본에서 집안으로 서울을 옮겼으니, 그 뒤로 장수왕 십오년(427)까지 사백이십사년 동안에 걸쳐 고구려의 수도가 되었던 곳이다.
국내성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한 동안 발해가 주둔해 있었으나, 오랜 뒤인 청나라 때에 봉금封禁 지구로 묶이면서부터 사람이 살지 않았고, 봉금이 해제된 뒤인 지금부터 일백 년 전엔 이십여 호에 머물던 인구가 오늘날에는 이십만을 넘는 도시가 되었다.
이렇듯 남의 나라 영토가 된 마당에 옛 고구려의 문물이 온전하게 지켜질 리 있었겠는가. 더구나 문명의 발달이란 미명 이래에서 더욱 마구잡이로 훼손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집안 시 중앙에서 통구와 압록강에 접해 있는 국해성 평면도는 거의 네모꼴인데, 성문은 원래 남쪽과 북쪽에 한 개씩, 그리고 동쪽과 서쪽에 두 개씩 모두 여섯 개가 있었다고 하지만, 1921년에 성을 개수하면서 모습이 변한 것에 이어 1947년에는 중국의 공산당과 국민당이 싸우면서 형체를 찾을 수 없게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돌담을 끼고 성의 위치를 찾아 나서자 어느 성벽은 민가의 축대로 이용되어 아예 집터의 벽이 되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집 앞에 아무렇게 나 널브러져 있는 돌 또한 성벽에서 주워다 놓은 것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또 서쪽 성벽의 남부는 콘크리트로 하천 둑을 쌓고 그 곳에 집들을 지음으로써 성벽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원래 성벽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치推’-중국에서 馬面이라고 함-가 설치되어 있는데(치는 적이 접근하는 것을 정면이나 측면에서 격퇴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네모나 반원형으로 쌓은 곳을 말한다), 이치의 위에 있는 누각을 포루鋪樓라고 하며 성 모서리의 치위에 누각을 세운 것을 각루角樓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이 고구려 성의 뚜렷한 특징인 것이다. 일백칠십오년 당시에만 해도 모두 열네개에 이르는 치의 흔적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국내성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치가 어이없게도 화장실 가리개와 공사장 가건물벽으로 쓰이고 있는 형편이니, 이 마지막 치의 운명 또한 바람 앞에 등불인 셈이다.
칠이 다 벗겨진 국내성 팻말을 뒤로 하고 숙소로 향하여 가는 발걸음은 실로 알 수 없는 비애감과 죄책감,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물질 문명의 발전만을 가속화시키는 경제 논리와, 후손들의 무관심 속에서 고구려의 국내성은 그렇게 사라져 가고 있었다.
겨레의 역사가 아무리 깊고 두텁다한들, 그 문물의 유산이 빈곤하고 물적 증거가 없고서야 무엇으로 역사를 내세울 것이며 또한 후손들이 어떻게 제 나라의 바른 역사를 배울 수 있겠는가.
지난 역사의 유산이 이처럼 이국 땅에 내버려진 채로 국민의 무관심 속에서 방치되어 사라져 가고 있음에서, 제 민족의 역사문화에 대한 무관심이 지속된다면 오늘날의 물질적인 번영 또한 다음시대에 가서는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 것임을 역사는 말없이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