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고의 근본주의는 가지를 쳐내거나 밑둥을 잘라내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모름지기 뿌리를 통째로 뽑아버리는 전 인류의 확철대오가 아니고서는 지구와 인류를 행복으로 이끌어나갈 수가 없다. 여기에서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하는 것이 석가모니의 삶과 가르침이다.
재물과 명예와 장수의 비결을 찾아 헤매는 중생들에게 그가 보여 준 삶은 ‘좀더 높이, 좀더 많이’가 아니라 ‘좀더 적게, 좀더 낮게’였다.
곧, 석가모니는 우리와는 판이하게 행복을 거꾸로 찾아간 것이다.
자유 경쟁 속에서, 많이 가진 자들이, 높게 자리한 자들이 행복을 누리는, 또는 행복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전형적인 인간상으로 군림하는 사이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지니고 있던 그것 들을 오히려 하나, 둘씩 놓아버리고 나누어 줌으로써 참된 행복의 문을 우리에게 보여 준 것이다
그러나 행복에 대한 어리석은 믿음에 빠져 있는 우리 중생들은 그 가르침을 믿기도 어렵거니와 행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길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포기하고, 모양새나 조금 내려니까, 남도 속이고 자기도 속이며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들과 바닷가애 나간 적이 있다. 멀리 수평선을 가리키며 아이에게 말했다.
“저기가 바다의 끝, 수평선이야. 보이지?”
그러자 아이가 대뜸 말을 받았다.
“그럼 바다의 시작은 어디에요?”
갑작스런 물음에 멈칫하던 나는 이내 그 해답을 아이의 질문 속에서 찾아냈다.
“시작,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여기 해변이지.”
나는 그 때 문득 바다의 끝도 또한 수평선이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발 밑이라는 사실을 놀란 듯이 깨달은 것이다.
경전의 백미라 일겉는 ‘반야심경’에 전도몽상顧倒夢想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생각하는 것이 거꾸로 뒤집혀 있을 뿐만 아니라 꿈처럼 허황되기 짝이 없다는 뜻이다. 중생들의 어리석음이 이와 같으며 , 바로 그 점이 중생을 더욱 괴로움의 세계로 몰아넣고 부처님과의 사이를 더욱 멀리 갈라 놓는다는 대목이다.
퇴보를 발전으로 알고, 불행의 길을 행복의 길로 믿으며, 죽는 행동을 사는 행동으로 그릇되게 알 때 파멸은 빨리 올 수밖에 없다. 우리가 보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무엇을 얻는지를 다지기에 앞서 무엇을 잃는지부터 먼저 헤아려 볼 일이다.
정신과 물질, 너와 나.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삶에서 평화와 행복의 문은 열릴 것이다. 이 가운데 하나라도 잃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행복의 길이 아니라 파멸의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희망하는 행복은 일상의 사고 방식이나 가치관의 반대편에서 보란듯이 경멸의 냉소를 띠고 서 있는 것은 아닐까. 바다의 끝이 멀리 난 바다에 있지 않고 바로 발 밑에 자리하고 있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