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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찾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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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심을 일구는 이야기 - 이영일 1995년 03월 157호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희구한다.
행복, 듣기만 해도 편안해지고 뿌듯해지는 말이다. 그러나 돌이켜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신기루 같은 것일 수도 있고, 사람들의 부질없는 욕심을 아름답게 포장한 말일 수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이 실제든 감정이든 사람들은 그것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 행복은 어디서 어떻게 나타나는 것 일지가 문제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차 한잔이나 여인의 따스한 눈길에서도 행복을 느끼겠지만, 그것이 영원하지 않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나마 작은 행복조차 느끼지 못한 채, 행복이 머물듯이 보이는 저 너머를 향해 정신없이 내닫고 있을지도 모른다.
종교나 이념의 출발점도 실은 이것이 동기가 될 수도 있다. 해탈이나 영생을 얻는 일, 모든 일류가 자유롭고 풍요로우며 평등하게 사는 일도 뭉뚱그려 말하면 행복이다.
그러나 지향하는 바는 한 가지로 일치하지만 그에 대한 해법解法은 천차만별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은 자본의 많은 소유에서 또는 돈독한 신앙심에서 성큼 다가온다고 믿고 있다. 그 믿음을 중심으로 오늘의 인류역사와 세계문명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역사와 문명을 우리는 흔히 발전이나 진보라고 자평하며 긍지마저 가져왔다.
그러나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와 세계문명의 진행이 참으로 멸고滅苦의 행진이었던지를, 더 나아진 생활, 더 좋아진 세상이란 표현이 서슴없이 나올 만큼 진정으로 우리의 이 세상이 행복의 피안으로 다가가고 있는지를, 짧은 눈, 얕은 눈으로 언뜻 보면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의식주가 고급스러워지고 그 밖의 편의 시설들이 하루가 다르게 이른바 경쟁력을 서로 뽐내며 우리 곁에 선보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얼마 전 독일에 있는 어느 연구소가 발표한 내용에 다르면, 지구 곳곳에서 나타나는 이상 기후는 지구 온난화 현상 때문이며, 이러한 현상은 산업화 이후로 급속히 진행된 것으로서, 그 원인의 구십오 퍼센트 이상이 인간의 책임이라고 한다. 곧 사람들에 의해 앞당겨지고 있는 지구의 종말은 행복을 쟁취하려는 그 몸부림과 믿음의 어리석음 때문에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는 얘기이다. 이는 행복의 가치관에 대한 근본적인 점검이 결여되어 있다는 뜻이며, 멸고의 방법론에 크게 문제가 있다는 얘기이다
예컨대 행복을 찾아간다는 명분으로 마음껏 물과 공기를 더럽혀 오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것이 행복을 가져다 주기는커녕 뭇 생명을 몽땅 몰락시키고 말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과 같다. 또 실학이 그 시대의 명제였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의 근본적인 점검을 지나쳐 버려 결과적으로 서학西學을 믿으면서 동학東學을 일으키자고 외치는 꼴이 되고 만 것과 같다.

멸고의 근본주의는 가지를 쳐내거나 밑둥을 잘라내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모름지기 뿌리를 통째로 뽑아버리는 전 인류의 확철대오가 아니고서는 지구와 인류를 행복으로 이끌어나갈 수가 없다. 여기에서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하는 것이 석가모니의 삶과 가르침이다.
재물과 명예와 장수의 비결을 찾아 헤매는 중생들에게 그가 보여 준 삶은 ‘좀더 높이, 좀더 많이’가 아니라 ‘좀더 적게, 좀더 낮게’였다.
곧, 석가모니는 우리와는 판이하게 행복을 거꾸로 찾아간 것이다.
자유 경쟁 속에서, 많이 가진 자들이, 높게 자리한 자들이 행복을 누리는, 또는 행복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전형적인 인간상으로 군림하는 사이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지니고 있던 그것 들을 오히려 하나, 둘씩 놓아버리고 나누어 줌으로써 참된 행복의 문을 우리에게 보여 준 것이다
그러나 행복에 대한 어리석은 믿음에 빠져 있는 우리 중생들은 그 가르침을 믿기도 어렵거니와 행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길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포기하고, 모양새나 조금 내려니까, 남도 속이고 자기도 속이며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들과 바닷가애 나간 적이 있다. 멀리 수평선을 가리키며 아이에게 말했다.
“저기가 바다의 끝, 수평선이야. 보이지?”
그러자 아이가 대뜸 말을 받았다.
“그럼 바다의 시작은 어디에요?”
갑작스런 물음에 멈칫하던 나는 이내 그 해답을 아이의 질문 속에서 찾아냈다.
“시작,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여기 해변이지.”
나는 그 때 문득 바다의 끝도 또한 수평선이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발 밑이라는 사실을 놀란 듯이 깨달은 것이다.
경전의 백미라 일겉는 ‘반야심경’에 전도몽상顧倒夢想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생각하는 것이 거꾸로 뒤집혀 있을 뿐만 아니라 꿈처럼 허황되기 짝이 없다는 뜻이다. 중생들의 어리석음이 이와 같으며 , 바로 그 점이 중생을 더욱 괴로움의 세계로 몰아넣고 부처님과의 사이를 더욱 멀리 갈라 놓는다는 대목이다.
퇴보를 발전으로 알고, 불행의 길을 행복의 길로 믿으며, 죽는 행동을 사는 행동으로 그릇되게 알 때 파멸은 빨리 올 수밖에 없다. 우리가 보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무엇을 얻는지를 다지기에 앞서 무엇을 잃는지부터 먼저 헤아려 볼 일이다.
정신과 물질, 너와 나.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삶에서 평화와 행복의 문은 열릴 것이다. 이 가운데 하나라도 잃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행복의 길이 아니라 파멸의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희망하는 행복은 일상의 사고 방식이나 가치관의 반대편에서 보란듯이 경멸의 냉소를 띠고 서 있는 것은 아닐까. 바다의 끝이 멀리 난 바다에 있지 않고 바로 발 밑에 자리하고 있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