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관스님은 따닥! 하고 나뭇가지 밟히는 소리와 함께 나타났다. 산길 초입까지 안내하고 돌아선 도법스님이 전화로 연통을 한 모양이었고, 짐작보다 늦는다 싶자 마당에서 서성거리고 계셨던 것이다.
“안 무서우십니까?”
삼배 반 올리고 좌정한 다음 여쭈었다.
가슴속에 부처를 품고 사는 분에게 이 무슨 당찮은 질문이랴. 그러나 그 흔한 검은 칠조차 못한 알기등에다 아직 새 장판내가 활씬 나는 세 칸 방 요사체에는 딴 사람 기척이 없어 에둘러 물어 본 것이었다.
“혼자 살아요. 공양주도 귀찮고, 상좌도 귀찮고….”
직지사, 김룡사, 흥주사를 거쳐 지난해 봄에 이 곳 약수암으로 왔다. 약 한 번 안 쳤는데도 잘자라 준 무, 배추, 갓 따위로 김장해 놓고, 고소와 함께 남은 푸성뀌 땅속에 묻어 둔 다음, 엘피 가스 두통 들여 놓은 걸로 월동준비 끝내고, 이틀에 한번 쌀 익혀 놓았다가 출출하면 끼니 때우면서 ‘시도 때도 없이” 연관스님은 역경 일만 계속하고 있었다.
스무 살을 갓 넘길 즈음에 해인사로 출가하여 우봉스님을 은사로 수계하였다. 십 몇 년 동안 봉암사, 상원사, 해인사 등의 제반 선원을 전전하다가 직지사에서 관응스님을 만나 본격적으로 경전 공부에 힘쓰게 된다. 탄허, 운허 큰스님과 함께 손꼽히는 대강백인 관응스님은 그 연배로는 현재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분이거니와, 스무 해 가까이 직지사에서 상주하면서 “글 잘하는”스님들을 모아 경과 논을 가르쳤는데, 연관스님은 그 첫번째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산문에 든 뒤로 대전에서 다로 유학 공부를 한 적도 있었지만, 자칭 “문학도” 였던 연관스님을 관응스님은 친자식처럼 아껴 외국에 나갈 때도 수행하게 하곤 했다. 우봉스님을 뒤이어 그의 실제 스승이 되는 셈이었다.
연관스님이 번역한 「왕생집」은 중국의 운서 주굉 스님이 쓴 「왕생집」과 광중스님이 쓴 「정법개설」올 한데 묶은 것이다. 정토해 관한 이론과 실천을 내용으로 삼고 있는 이 책을 원고서, 참선 대신에, “아미타불을 불러 미타의 힘으로 성불하려고” 연관스님을 찾아온 스님도 있었다.
“초장 작품”이라 한문투가 심하여 새로 손을 보고 있는 중이라 하는데, 방 한가운데 놓인 스님의 괴목 책상위에 놓인 그 책을 얼핏 들춰 보니 고칠 데를 붉은 펜으로 표해 놓은 품이 여간 양전하고 꼼꼼한 게 아닌 것은 뜻밖이었다. 다기를 다루되 그에 휘둘림이 없고, 부처님 경전에서부터 조사들의 어록 및 ‘귀거래사’에 이르기까지 글속이 종횡무진하고, 몸집 또한 억세고도 푸짐하여 지레 품은 인상에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왕생집」에는 역주자로서 법명 대신에 ‘하청’ 이라는 호로 소개되어 있는데 그것도 관응스님이 지어 주신 것이다. “내 속성이 황’ 이니 붙여 읽으면 ‘황하청’ 이 되지 않겠소. 중국에서 황하강이 맑아지면 성인이 나온다는 전설이 있답디다.”
그러고 나서 스님은 “노장이 미지”
하며 히히힛 웃었다.
「왕생집」말고도 연관스님이 번역하고 주를 단 「죽창수필」은 선객들뿐만이 아니라 사부대중의 사랑을 살뜰히 받아 1991년 1월에 초판이 나온 뒤로 지금까지 4쇄째가 나옴으로써 불교서적으로서는 드물게 이른바 스테디 셀러의 반열에 오른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인 운서스님은 명나라 때 사람으로서 항주 운서산에서 총림을 개설하고 계율의 부흥과 정토법문을 제창하는 등 선과 염불과 계율에 두루 관심을 갖고 활약한 대종장으로 그의 저서는 서른여 종에 이른다.
명말 청초 때 사람인 지욱스님은 본디 유가의 대가로서 불교에 대해 비판적이다 못해 말살하려고까지 했던 사람이나 운서스님의 「죽창수필」과 「자지록」을 원고 발심하여 출가했다고 한다.
“운서스님이 그러셨거든. ‘부처님이 오후 불식하라고 하셨거늘 중으로서 한밤중에 기름냄새 피우면서 야식까지 장만해 먹느라고 야단이냐’고.
그런데 그렇게 엄하게 꾸짖기만 하셨으면 감동이 덜했을 거야. ‘젊은 나이에 출출하기도 할 테지. 그럴 때는 과일이나 마른 떡 정도는 먹어도 되겠지’ 이렇게 농치셨거든.”
운서스님은 유가선비의 자손으로서 두 번 상처를 하여 아내를 세 번이나 맞아들였던 사람이다. 스물일곱에 아버지가 서른 한 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자 “망극한 어버이의 은혜를 갚으려고” 출가할 결심을 하니 그 때 나이 서른둘이었다. 행각 중에도 걸망 속에 위패를 모시고 다니면서 공양 때는 반드시 먼저 바치고 먹을 만큼 효성이 지극하였다. 산문에 들 요량으로 동침도 않았던 세 번째 아내인 탕씨를 출가 한 뒤에도 바로 곁에 두고 살기도 했으니, 철저하고 꼬장꼬장한 스님의 상을 훈훈하게 데우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성실하고도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연관스님의 역경 솜씨는 「죽창수필」 뒤로도 1993년에 선 보인 「선문단련설」-회산 계현의 「선문단련설」, 단운 지철의 「선종결의집」, 대혜 보각선사의 「종무문고」의 합본-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당시의 선림의 유폐를 신랄히 지적하는가 하면 실천 수도하는 방법을 밝힌 수행 지침서로서의 구실을 할 만한 이 책은 간화선이 중심인 한국불교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 있어 선원에서도 두루 읽혀 곧 재판을 찍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백 자원고지 이천오백 장 분량인, 운서스님의 「금강경간정기」도 일 년쯤 걸려 막 역주 작업을 끝낸 뒤라 올 유월쯤에는 세상에 선 보이게 될 것 같다.
거의 책으로 채워지다시피 하고 있는 그의 방 벽에는, 머리만 빼꼼히 내놓고 온 몸을 단술 단지처럼 담요로 휘감은 스님 그림 한 장이 압침에 꽂혀 붙어 있다. 그와 절친한 일장스님이 그려 보낸 것이다.
“멀리서 연관스님을 생각한다”는 뜻인 “원사연관”이라는 글귀는 아마도 일장의 연관에 대한 연서이리라.
지금은 제주도 목부원에서 살고 있는 일장스님이 어느 날 문득 그를 찾아와 “문장이 고졸하니 한번 읽어 보시게”하며 세 권으로 된 「죽창수필」 한 질을 내놓고 돌아갔다.
안동의 어느 토굴에 살 때였다. 눈은 세상을 뒤덮으려고 작정이나 한 듯이 쏟아져 내리고 혼자서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지 가슴이 터질 듯하고 “미쳐 죽을 것만 같아서”일장스님이 놓고 간 「죽창수필」을 밤낮없이 주야로 글귀를 더듬어 번역을 했다. 애초에 책으로 묶어 낼 요량도 아니었고. 후학들이 읽고 감화 받기를 기대하고 한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살려니 너무 심심하여” 그저 파적 삼아 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어줍잖은 짓”이라고 판단한 일에 끄달림이 없어 보인다.
「죽창수필」을 펴 낸 곳에서 4쇄가 나온 뒤 인세를 주려 했지만 “설에 약수암을 찾은 신도가 대여섯 사람밖에 안 되는 썰렁한 살림살이”임에도 돈은 마다고 그 액수만큼의 책을 달라고 하여 주위에 법보시해 버렸다.
그러고 보니 그를 역경의 길로 이끈 관응스님이 계신 직지사를 비롯하여 문경의 김룡사, 태안 반도의 흥주사 등지에서 강백 노릇을 한 바는 있지만, 한번도 주지 노릇을 해 본적도 없고, 따로 제자로 내세울 만한 사람도 두어보지 못했다. 시대의 부름을 좇아 어떤 일을 목적하는 모임의 선봉에 서는 도반들과 가까이 지내기는 하지만, “저마다 할 일이 따로 있는 법”이고, 자신은 그런 “쨉이”도 못 되어 어떤 단체에도 가담해 본 적이 없다.
그의 행리나 어법도 그러하거니와, 어떤 일에서건 ‘의도적이고 작위적인 것”을 지우고 싶어한다.
부귀는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고
신선되기를 기대할 수도 없는 것
친구들과의 정화를 즐거워하고,
거문고 치고, 독서하고. 근심이나 잊을 뿐
몸뚱이 이 세상에 붙여 사는 것이
얼마나 되리
도연명의 ‘부질없음’도 그가 자주 차용하는 시구이거니와, 그의 일상적인 풍모는 학승이라기보다 선승에 가깝다. 격식을 싫어하여 “함께 무슨 일을 도모할 사람은 못 되고”, “낭만적인 사람”이라는 주위 도반들의 말도 그런 면에서 옳다. 그러나 그런 면모는 “치열한 구도자”로서, “자기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깊이 귀 기울이는 자”가 깊은 자의식과 함께 보이는 인간적이고 양심적인 얼굴이라 말 할 법하다.
그가 시도 때도 없이 제 일만 헌다지만 중앙의 세존불과 함께 제자들과 보살들이 돋울 새김된 목조 탱화를 모신 법당에서 아침 예불은 빠뜨리지 않고 올린다. 실내용 싸리 빗자루를 집 앞뒤로 여섯 자루씩이나 걸어 놓고 방과 마루, 그리고 아마도 마음 밭을 시시때때로 쓸어 내기도 한다.
해질녘이면 갈가마귀떼들이 머리 위로 빙빙 돌며 우짖는 소리를 “야, 이 새끼들아”하고 야단치는 소리로 듣는다
「왕생집」 책 뒤에는 이런 말도 적어 두었다.
“내 몸이 부처 될 때까지 부처님의 계율을 철저히 지키면서 조금도 범하지 않겠나이다. 부디 원하노니 부처께서 증명해 주소서, 내 죽을 때까지 물러나지 않겠나이다.
나무아미타불.”
그의 방은 까친지 까마귄지 새로 해 바른 창호지 문을 부리로 쪼아 따로 문 열어 통기할 필요가 없을 지경이었다.
십 년 동안 단정히 앉아 심성을 옹호하니 깊은 숲속의 새가 놀라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서산 대사가 오도 후 읊은 바 있거니와. 헤진 올로 부풀부풀해진 가사를 입은 그의 어깨에 새가 겁 없이 내려앉아 깃을 가다듬기도 한다.
빨치산 소굴이었던 약수암은 주위로 송림이 울창하고 축담 아래로는 대나무가 촘촘하게 자라 한낮에도 어둑했다. 지리산이 거느린 곳치고 풍광이 어눌한 곳이 없지만, 가파른 절터의 눈 아래로 달리는 산릉의 기풍은 출중하였다. 법당 아래 양편으로 “관음보살의 젖”인 약수가 흐르는데, 한겨울하고도 혹독한 가뭄인데도 마르는 법이 없어 이름값을 하거니와 물소리가 실하고도 청량했다. “놀아도 저절로 도가 트일 만큼 자리가 좋은 곳”이라 했다.
떡갈나무 숲 속에 졸졸졸 흐르는 샘물이길래
아무도 모르라고 도로 덮고 내려오지요.
나 혼자 마시곤 아무도 모르라고
도로 덮고 내려오는 이 기쁨이여
목청껏 노래 부르던 스님은 무심하게 말했다.
“나 여기 오래 살라네. 나무도 많으니 화장하기도 좋고. 사십구재만 해 주지, 비는 세우지 말라고 도법이한테 일러 놓았고…’
지난해 사람을 다 불러 모아 놓고는 핵심 멤버가 서울 가서 “바쁜 일 하느라고” 흐지부지된, 연관스님이 동참하게 될 화엄학림도 사월 초파일 이후로 개강할 예정이고, 유월쯤에 운서스님의 유적지인 항주를 찾아 몇 달쯤 중국을 다녀 올 계획도 세워두고 있는 만큼 그런 말씀은 지나치게 때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세수 마흔여덟이신데!
올해는 지난 해 못 심은 감자도 심어 스님도 잡숫고, 눈 속을 후비는 주린 토끼에게도 보시하셔야 하지 않겠는가.
김영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