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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주 무제의 폐불, 그리고 도전에 대한 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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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 김태형 1995년 03월 157호
불교와 도교와의 만남, 그리고 대립과 항쟁
몇 해 전 군복무를 하고 있을 때 우연히 접한 기독교계 잡지에서, 기독고가 한반도에 전래된 것이 일천여 년 전의 일이라면서 그에 대한 증거로 경북의 한 지방에 있는 마애조상군磨崖彫像群을 예로든 것을 보았다. 그것을 주장한 사람은 서울의 한 중학교 교사였다. 그가 학생들에게 그러한 주장을 신빙성 있는 사실로 가르친다면 학생들은 그의 주장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터이고 그럼으로써 역사가 크게 왜곡될 가능성마저 있어 등골이 오싹했던 기억이 난다.
한국과 일본과의 역사논쟁 가운데 아직도 불씨를 안고 있는 문제에 ‘임나일본부’설이 있다. 민족사이에 서로의 우위를 논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역사이며, 역사가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우위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중국의 불교와 도교와의 논쟁도 결국은 그와 같은 문제이니, 그 출발은 석가모니와 노자 출생 연대의 선후 문제였다.(그 둘의 출생 연대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계속되는 부분이라 구체적인 논의는 생략한다.)
서기 67년 명제 영평 십 년에 전해진 불교를 중국인들은 도교(노자교)와 서로 유사한 것으로 받아들였는데, 이는 노자가 말년에 함곡관을 떠나 인도로 들어가 오랑캐(인도 사람)를 교화했다고 믿는 당시의 노자화호설老子化胡說(노자불타설) 때문이었다.
그러나 불교전래 초기의 유사성에서 비롯한 도교와 불교의 호의적인 관계는 인도에서 다양한 경전과 높은 학덕을 지닌 승려들이 속속 도래하자 도교와 불교의 사회적 위치는 일순간에 불교 우위의 상황으로 돌변하면서 깨져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도교는 그 동안의 사회적 기득권에 대한 상대적 우위를 빠른 속도로 상실해 갔고 이에 대한 불안감으로 그들은 적극적인 방법을 통해 불교와의 대립 항쟁을 시도하면서 과거의 영화를 되찾으려는 다각적인 노력을 경주해 왔다. 그런데 불교가 빠른 속도로 사회에 퍼져나가자 위기 의식을 느낀 도교도들은 불교를 중국 땅에서 추방하기 위하여 도술 경쟁을 벌였다. 이 경쟁은 후한 명제의 재가 아래 이루어져 당시로서는 대단한 흥미거리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경쟁의 방법은 동쪽과 서쪽에 각각 제단을 설치하되 서쪽에는 백신을 제사하고 도교의 경전을 봉안하고 동쪽에는 부처님의 사리와 불경을 봉안한 뒤에 두 제단을 한꺼번에 불지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도교의 경전은 제단 위에서 한 줌의 재로 변했으나 동쪽 제단의 불사리佛舍利는 광명을 발하면서 신령스럽게 변했다고 한다.
이로써 불교와 도교와의 대립 제1라운드는 불교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후에도 불교와 도교와의 대립은 계속되어 결국 북위 무제의 법난, 북주 무제의 법난으로 이어졌다.
여기에서 ‘북주 무제의 폐불’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북위 무제 당시 유교지상주의를 꿈꾸면서 도교의 구겸지와 함께 폐불에 앞장섰던 최호의 폐불 행각과 관련환 얘기를 간단히 살펴보자.
최호는 태무제 때에 주변 국가들에 대한 수차례의 정벌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한때 무제로부터 대단한 신임을 받았지만 뒤에 가서 호족을 멸시했다는 이유로 태무제에 의해 입 안에 오줌이 뿌려지는 무참한 죽임을 당했다. 이에 대해 「불조통기」 제38장은 최호가 폐불을 할 때 길거리에서 불상을 보면 반드시 가마를 세우고 그 불상에 오줌을 누었다고 전하며, 「북사」 권21은 불교를 신봉하던 최호의 처 곽씨가 독송하고 있던 경전을 빼앗아 불태워 그 채를 변소에 버렸기 때문에 인과응보로 그와 같은 죄과를 치루었다고 전하고 있다.
북위 무제를 능가하는 법난을 저지른 북주의 무제는 북위 무제와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불교에 상당히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도사 장빈과 위원숭衛元嵩 농간으로 훼불을 단행하였다.
북주 무제가 도사 장빈과 위원숭의 농간에 넘어가게 된 까닭은 다름아닌 검은 옷은 임금에게만 합당하다’ 는 비기秘記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비기로 말미암아 북제의 문선제도 승주선사를 검은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살해하였으며, 주 명제는 자신의 옷을 검은 색으로 바꾸고 승려들의 옷은 황색으로 바꿔 버렸다고 한다.
북주 무제를 꼬드긴 도사 장빈과 위원숭에 대해서는 장빈은 도사(도교 성직자)라는 것 밖에는 특별히 그의 전기가 전하지 않고 있으나, 위원숭은 익주의 성도 사람으로 어려서 출가하여 이름을 알 수 없는(亡名) 법사의 제자가 되어 야안사에 머물다가 불교의 부패상을 보고 환속했다고 전한다.
도교와 불교 논쟁의 시작이 새로운 것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의 발로였다면, 뒤에 가서는 차츰 세력 다툼으로 번져 시간이 흐를수록 극심한 논쟁과 더불어 사상적, 역사적 우위를 차지하려는 피나는 싸움으로 치달았다.
520년 북위의 효명제 앞에서 도교의 강빈姜斌 불교의 담무외曇無畏가 중심이 되어 벌인, 석가모니와 노자의 선후문제에 대한 논쟁은 불교와 도교가 첨예하게 대립한 근원이 되었다. 심지어는 각 종교의 사소한 내부 문제까지 논쟁의 도마에 올라 감정의 대립을 가져왔고, 결국에는 권력에 밀착한 쪽이 상대방을 누르고 승자의 위치를 차지하기도 했으나 북주의 무제 경우와 같이 둘 다 함께 궤멸하여 제3자인 유고가 득을 보는 경우도 발생했다.
앞에서 말한, 효명제의 도교와 불교의 논쟁에서 명제는 북위의 사관인 위수魏收를 필두로 한 백칠십 명의 학자들로 심사위원회를 만들어 도사 강빈이 주장한 ‘노자개천경’-이 경에서는 노자가 기원전 605년에 출생했다고 함-의 진위 여부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강빈의 주장이 근거가 없음을 확인하고 그를 백성을 미혹시켰다는 이유로 처형하려 했지만 보리 유지가 나서서 오히려 강빈의 구명운동을 펴 그의 형량을 유배행으로 낮추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종교인으로서의 아량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도교도들은 이 논쟁에서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서, 561년부터 577년에 걸쳐 재위한 북주 무제의 치하에서까지도 논쟁을 가속화함으로써 결국 동반자살의 길을 택하는 우를 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