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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과 흠모의 마음은 시공을 초월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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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의 부처 - 장휘옥 1995년 03월 157호
지난달에는 석가모니가 성도하기 전의 생애를 ‘역사적 사실의 기록’에 의해 살펴보았다. 이번 달에는 ‘신격화된 전설’을 통해, 석가모니의 생애는 왜 신격화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의의는 어디에 있는 지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신격화 된 전기를 보면, 석가모니는 정신적으로는 물론 겉모습으로도 우리와는 다른 인간으로 태어난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석가모니는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은 뒤, 오른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땅을 카리키면서, “하늘 위나 하늘 아래서 오직 나만이 귀한 존재이다(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하고 외쳤다는 것이다. 해마다 사월 초파일에 절에서 관욕시키는 불상이 바로 이러한 모습의 탄생불誕生佛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아무리 석가모니가 위대하더라도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걷고 말을 했다고 한 것은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뒤에 설명하는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 마냥 우리의 인식을 초월하는 전생前生 문제라면 반신반의하면서도 믿겠지만.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을 이렇게 비논리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데 믿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왜 이와 같은 비논리적인 전기가 만들어졌는지를 규명하기에 앞서 이러한 석가모니의 전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부터 알아보자. 개과천선改過遷善한 사람을 보고 새로 태어났다고도 하고 고향 아닌 타향도 정 붙이고 살면 제2의 고향이라고도 한다. 이것과 마찬가지 논리이다. 여기서에의 탄생은 석가모니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을 것을 예고하는 전주에 해당된다. 곧 인간석가모니의 태어남을 제1의 탄생, 깨달음을 얻었을 때의 석가모니를 제2의 탄생으로 간주하여 게2의 탄생에 대한 예고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도 이 세상의 제1인자임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 개개인은 누구나 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귀한 존자임을 널리 선포하는 말이다.
그러면 석가모니의 전기를 왜 이렇게 신격화시켜 상징적으로 묘사하였을까. 흔히 소크라테스의 부인이 악처가 아니었으면 소크라테스는 위대한 철학자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소크라테스는 그의 부인이 악처였기 때문에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많은 것을 사고한 결과 위대한 철학자가 되었디는 얘기이다. 그러고 보면 소크라테스도 어떤 의미에서는 싫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위대한 철학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언젠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사가 텔레비전 대담시간에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사회자가 ‘세계적인 석학이 되신 동기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더니, 그는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키가 작은 것이 불만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어느 날, 하숙 집 방에 누워서 무심코 벽에 걸린 자기의 바지를 보니 너무나 짧아 보였다. 이때부터 그는 키작은 것이 콤플렉스가 되어. 사귀고 싶은 여학생이 있어도 말 한번 건네 보지 못하고 고민하다 자살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죽으려고 하니 너무나 분한 마음이 들어, 그때부터 생각을 바꾸어 어떻게 해서라도 성공해서 이 한을 풀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신체 조건과 상관없는 학문의 길을 택하게 되었고, 결국 평생을 연구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것은 자신의 콤플렉스를 오히려 역으로 이용해서 성공한 사례이지만, 이것도 결국은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강한 몸부림에서 나온 하나의 방법이다.
영화 서편제 도 같은 맥락이다. 진짜 창唱은 한恨에 묻히지 않고 한을 뛰어 넘는 소리라 한다. 한을 뛰어넘는 소리를 내려면 먼저 한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기에, 멀쩡한 눈을 일부러 멀게 해서 한 맺힌 인생을 살게 하고, 결국 그 한을 뛰어넘는 경지에 이르게 한다. 생각해 보면 정말 끔찍한 일이다.
인생에서 어떤 경지를 뛰어넘어 한 분야의 달인이 되기까지에는 보통 결심이 필요한 게 아니다. 삶에 절망한 사람들이 진정으로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절실히 원하고 바라는 마음, 곧 원망이 없으면 이루기 힘들다. 그 원망도 보통 원망이 아니라 죽음도 불사한 원망이어야 한다. 이처럼 우리는 일생 동안 한 가지 일의 한계도 뛰어넘기 힘든데. 석가모니는 인생의 어느 한 경지를 초월한 것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 다시 말하면 끝없는 윤회의 바퀴에서 완전히 벗어나버렸으니 어찌 감탄과 탄성의 소리가나오지 않겠는가.
석가모니의 입멸과 함께 사람들은 석가모니에 대한 존경과 흠모와 외경의 마음에서 그를 차츰 초인화시켜 갔으며, 이것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해 갔다. 그 결과 이 위대한 존재 석가모니가 얻은 깨달음은 결코 이 세상에서의 수행만으로는 얻어질 수 없으며, 아득한 과거로부터 여러 생을 거치면서 부지런히 정진하여 선행과 공덕을 쌓아온 결과라 생각하게 되었다. 이로인해 만들어지게 된 것이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쟈타카)’ 를 비롯하여 신격화된 많은 전설들이다.
‘전생 이야기’에 다르면 석가모니는 전생에 ‘스메다’라는 구도자였으며, 스물네 명의 부처님을 차례차례로 만나 그 앞에서 중생들을 구하기 위한 서원과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열 가지 수행인 십바라밀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도 역시 구도자의 신분으로 도솔천에 있었으며. 거기에서 내려와 마야부인의 태내로 들어갔다. 만삭이 되어 인도의 관습에 다라 해산하려고 친정으로 가는 도중에 룸비니 동산의 무우수 가지를 잡고 있는 마야부인의 오른쪽옆구리로 태어났다.
이것은 석가모니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인연을 설명하려고 만든 것이다. 석가모니의 탄생 목적은 어디까지나 전생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구도자로서의 자기 수행인 ‘자리自利; 행과 중생을 구제하는 ‘이타利他’ 행의 축적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밖에도 석가모니의 일생을 전하는 경전 가운데에 한 신격화된 전설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모두 불교의 기본정신인 ‘자리’ 와 ‘이타’행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