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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형벌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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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김진태 1995년 03월 157호
둥근 달이 유난히도 밝은 정월 열 닷새 날, 달을 머리에 이고 늦은 귀가 길을 재촉하다가 문득 나도 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졌다. 어느 사형수가 법이라는 이름 아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자기는 억울하다면서 죽어 원귀가 되어서라도 자기를 단죄한 자들에게 복수하겠다는 저주를 남겼다는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난 까닭이다. 그는 과연 무죄였을까? 그리고, 그의 영혼은 정말로 그들에게 복수를 하였을까?
인간들은 우주의 수 많은 존재 가운데에서 오직 자기들만이 이른바 문화라는 것을 창조하고 규범적 질서 아래 공동체 생활을 영위한다고 자부하면서, 그러한 생활 질서를 깨뜨리는 행위를 범죄라는 이름으로 단죄하고 또 형벌이라는 제재를 가하면서 남의 생명까지 박탈한다.
이러한 제도 밑바탕에는 그 범죄 행위에 상응한 제재를 가하여야 한다는 말하자면 형벌의 종류와 분량도 범죄 행위에 상응해야 한다는 사상이 깔려있다. 형벌의 본질은 응보라는, 이른바 응보형설이 인류의 역사 곧 정확하게는 서양의 역사를 지배해 왔고, 힘에 밀린 동양 역시 자신의 삶의 바탕을 되돌아 볼 겨를도 없이 이러한 사상의 세뇌에 빠져 버렸다.
물론, 지난 세기 이래로 형벌이란 범죄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저지르지 않도록 하려고 과하는 것이라는, 이른바 목적형설이 주창되어 왔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응보형설과의 자리바꿈마저 시도하고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유일신을 믿고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관을 가진 셈족의 문화가 서양을 지배하고 또 동앙마저 아우르게 되면서, 범죄는 사회의 생활 질서를 침해하는 반규범적인 행위이고, 형벌이란 이러한 범죄에 대한 마땅한 보복이라는 관념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응보형이든 목적형이든 형벌이 과연 그러한 것이며, 그쯤에서 용인하고 말아야 하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고 외치는 인간이 바로 자기들에게 과하는 형벌이라는 것이 고작 보복하는 것이거나, 자신들에 대한 도전을 차단하기 위하여 사전 예방을 위해서라는 핑계로 물리적 제재를 가하는 것으로 자족하는 것인지. 불교 교리를 떠나 스스로 우주보다도 더 크다고 자부하는 인격체로서도 뛰어넘어야 할 이론이 아닐까 싶다.
수 많은 다양한 신들을 인정하고 영원한 변화 속에서 선한 힘과 악한 힘의 갈등을 통한 생성과 소멸의 되풀이를 역사로 파악하고 있는 인도 까르마의 문화를 밑바탕으로 하고 있는 동양 문화권에서도 그에 대한 이해는 같을까? 내가 아는 한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먼저 불교의 시각에서 한번 살펴보자.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행위는 마음의 반연反緣에 불과하다. 그 행위가 선하든 악하든, 또 설사 그것이 범죄로 규정되고 형벌이 부과된다고 하더라도 예외가 되지는 않는다.
불교의 진리의 눈으로 보면 외부의 행위를 포함하여 모든 것은 무상하며 변하지 않는 실체는 없다. 또한 실제가 그러하다. 결국 세상은 끝없는 흐름 속에서 하나의 사물이 사라지면 그것은 인과의 연속에 따라 다른 사물이 나타날 수 있는 조건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의 삶 또한 변화의 연속과정에 있는 하나의 흐름에 불과할 뿐,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고스란히 이어지는 것은 전혀 없다. 존재란 갈애渴愛의 쇠사슬에 묶인 채로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갈애의 발생 원인은 갈애의 내부에 있다. 발생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어느 것이든 소멸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갈애 역시 그러하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인연으로 생기므로 자아란 실체가 없다. 자아라는 관념은 허구이고 그릇된 신념에 불과한 것이다. 그에 일치하는 실재는 어디에도 없으며 오히려 ‘나’니, ‘내 것’ 이니 하는 또 ‘이기심’ 다위의 번뇌를 일으킬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되며,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악이 이러한 그릇된 견해에서 비롯된다. 죄의 실체 역시 그러하다.
모든 의도적인 행위는 그 결과를 낳는다. 만일에 선한 행동이 선한 결과를 낳고, 악한 행동이 악한 결과를 낳으면 그것은 그 자신의 본성과 법칙에 의한 것일 뿐이지 그러한 행위를 심판하는 어떤 초월자나 힘이 있어 그들에 의해 주어지는 정의나 상벌은 아니다.
생각 자체가 바로 생각의 주체이다. 달리 말하면 생각의 배후에 생각의 주체가 다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행위를 하고, 느끼고, 깨닫는 것 다위도 바로 그것이 그 주체이지 다로 주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범죄도 또한 마땅히 그러하다. 다라서, 형벌이란 범죄가 어떻게 발생했으며, 어떻게 하면 그것을 제거할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하는 것일 뿐이다. 말하자면, 범죄의 본질에 대한 통찰이 절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무상하므로 죄의 바탕 역시 실상이 없다. 말하자면 공空한 것이다. 다리서 범죄에 대한 형벌은 죄의 바탕이 공함을 깨닫게 하고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이를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이 그 중심 내용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불교의 자자自恣 포살布薩을 기반으로 하여 형벌론을 구상한 이도 있었다. 안거 마지막 날 스님네가 모두 모여 대중 앞에서 그 동안 지은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는 의식인 자자나, 일정 기간 동안 지은 죄가 있으면 참회하여 선을 기르고 악을 멀리하는 의식인 포살로써 형벌의 내용을 구성하여야 죄의 본질을 제대로 밝힐 수 있고 형벌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해방을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그 하나 하나가 그대로 완전하고 절대이니, 죄란 그러한 깨끗한 거울에 낀 먼지와 같은 것이므로 형벌은 그 먼지만 깨끗이 털어내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방법도 먼지만 깨끗이 털어내야지, 먼지를 털어내느라고 또는 먼지를 털어낸다는 구실로 거울에 흠을 내거나 항차 깨뜨리면 안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은 그 자체로 완성된 절대이니 누가 대신 먼지를 털어 줄 수도 없고, 털어 주려고 한들 털리지도 않으며, 오직 스스로 자신의 먼지를 제거해야 된다.
결국 형벌이란 그가 만지를 제대로 제거할 수 있도록 일깨워 주고 이끌어 주는 것이 되어야 제대로 된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