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설)
1. 절대공간론을 넘어서서
우주 모든 ‘있음(有)’의 뿌리를 땅, 물, 불, 바람, 허공, 마음의 여섯가지 구성요소(六大)에서 찾으려는 사유는 부처님 당시 다원론적인 신흥사문들의 사상에서 발견되어집니다.
다원론자들은 하나인 절대생명(Tad Ekam)의 굴러 변함(轉變)에서 온갖 것의 실재를 규명하려 했던 ‘부라마니즘’에 반대해서 다원적인 요소들의 모여 쌓임(積聚)에 의해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육사외도(六師外道)의 한사람인 파쿠다(Pa-kudha Kaccayana)는 존재의 구성요소로서 지, 수, 화, 풍, 고, 락, 영혼(地.水.火.風.苦.樂.靈塊)의 일곱가지를 들고 있고 고사알라(MakKhali Gosala)는 영혼, 지, 수, 화, 풍, 허공, 득, 실, 고, 락, 생, 사(得.失.苦.樂.生.死)의 열두가지의 요소를 말하고 있읍니다.
자이나교의 교조인 니간타 나타풋타(Nigantha Nataputta)도 존재를 영혼(jiva)과 비영혼(ajiva)의 두가지 요소로 크게 나누고 다시 영혼에는 지, 수, 화, 풍, 동물, 식물의 여섯가지가 있고 비영혼에는 법(dharma; 운동원리) 비법(adharma;정지원리) 물질(pudgala) 허공(akasa)의 네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다원론자들의 사상적인 흐름은 후대 육파철학(六派哲學)의 바이세시카(Vaisesika)학파나 니야야(Nyaya)학파에 까지 이어지는 인도철학의 한 큰 물줄기인 것이니 바이세시카 학파에서는 존재 구성의 실체로서 지, 수, 화, 풍, 허공, 시간, 방향 아트만의 아홉가지를 들고 있읍니다.
또한 시대사상과의 끝없는 충돌과 교류속에서 발전해온 불교교설 속에서도 이러한 다원론적인 언어개념들이 연기중도(緣起中道)를 나타내기 위한 표현형식으로 도입되어지고 있읍니다.
예를 들면 본경에서 밝힌 것과 같은 육계무아(六界無我)의 설법이라든가 수능엄경(首楞嚴經)에 나타나고 있는 존재의 일곱가지 구성요소(地.水.火.風.空.見.識)가 바로 여래장(如來藏) 자체라는 설법이라든가 밀교(密敎) 경전의 육대 무애연기(六大 無礙緣起)의 교설 등이 그것입니다.
일원론적인 부라마니즘에 의하면 물질, 공간 등 모든 것은 인간의 마야(maya:幻影)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며 실로 있는 것은 부라만이라는 절대생명 하나 뿐 입니다.
그러나 다원론자들에 의하면 물질은 더 이상 나눌 수도 없고 결코 사라지지도 않는 원자들의 모임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허공은 물질을 담아주고 있는 불변의 실체로서 이야기 되어집니다.
이러한 다원론자들의 공간개념은 후대 바이세시카학파에 이르르면 허공이란 모든 것에 존재운동의 터전을 마련해 주는 오직 하나이고 늘 머물어 있으며 온누리에 두루해 있는 그 무엇(唯一, 常住, 遍在)으로 말하여 집니다.
서양에서도 뉴우톤은 그 자체로서 길이 움직이지 않는 공간의 실재를 주장하여 그것을 절대공간(絶對空間)이라 하였읍니다. 그에 의하면 공간은 물질을 넣는 무한한 그릇이며, 모든 물질의 관성운동(慣性運動)이 이루어지고 있는 움직임 없는 절대의 터전인 것입니다.
칸트(Kant)도 인식의 모든 범주를 규정해 주는 선험적인 형식으로서 절대공간을 말하였읍니다.
그러나 다같이 절대공간을 말하고 있지만 뉴우톤에 있어서 공간은 인간의 주관에 독립되어 있는 객관적인 실재로 나타나고 있는 반면에 칸트에 있어서는 공간이 인식의 틀을 이루어주는 직관형식이므로 주관적인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읍니다.
본경에서 부처님이 설하고 있는 땅.물.바람.허공.마음(地.水.火.風.空.識)의 여섯가지 요소(六大:六界)에 실체가 없다는 육계무아설(六界無我說)에 의하면 물질은 물질 아닌 물질(물질은 지.수.화.풍 네가지 요소의 화합으로 이루어지지만 네가지 요소 자체가 자성이 없으므로)이며 허공은 허공 아닌 허공인 것입니다.
즉 물질이 물질자체의 실체가 있다면 물질의 쉬임없는 바뀜(變化)과 움직임(運動)은 이루어질 수 없으며 허공이 허공자체의 실체가 있다면 물질을 그 안에 담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없는 태허공속에 무수히 떠 있는 별들의 신비, 하늘 땅에 가득한 온갖 것의 끝없는 펼쳐짐도 허공과 물질의 무자성의 인식을 통해서만 제대로 해명되어질 수 있읍니다.
그래서 옛 선사들은 물질의 있음이 있음 아닌 있음이며 허공의 없음이 없음 아닌 없음임을 보이기 위해 ‘저 막혀 있는 담장이 막혀 있음이 아니며, 저 열려져 있는 허공이 열려져 있음이 아니다’고 하였읍니다.
그리고 공간의 한 위치를 차지하여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한 그루 나무마저 그 있음이 있되 실로 있음이 아니며 배경을 이루고 있는 공간의 없음이 없되 실로 없음이 아닌 중도실상(中道實相) 을 보이기 위해 “한 줌 버드나무 가지 거둘 수 없어서 바람결에 나부끼는 대로 옥난간에 걸어두노라(一把柳條收不得 和風搭在玉欄千:密庵禪師)”고 노래하였읍니다.
또한 수능엄경은 물질과 허공이 하나도 아니고 다름도 아닌 뜻을 다음 같은 비유를 써서 보여 주고 있읍니다.
“아난아 허공의 성품이 모습이 없어서 물질(色)로 말미암아 나타난다.
마치 그것은 실라벌성의 강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여러 사람들이, 편안히 살 곳을 마련키 위해 우물을 파 물을 구할 때 흙이 한 자쯤 나오면 그 속에 한자의 허공이 나오고 다시 흙이 한 길쯤 나오면 그 속에 한 길의 허공이 생기게 되어 허공의 깊고 옅음이 흙이 많이 나오고 적게 나음을 따르는 것과 같다.
……… (중략)
아난아 한 우물이 비면 허공이 한 우물만큼 생기며, 온누리의 허공도 또한 그러하여 온누리에 가득하나니 어찌 정해진 곳이 따로 있겠느냐”
위의 비유에 의하면 허공과 물질이 같지 아니하므로 우물 흙을 팔 때 흙에 따라서 허공이 생겨나며, 허공과 물질이 다르지 아니하므로 흙을 파낼 때 허공이 밖에서 들어오는 것도 아니며 안에서 스스로 생겨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불타의 공간관에서 보면 물체와 물체 사이의 거리와 넓이도 물질적인 제조건의 변화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규정되어지는 것이며 공간 자체도 물질과 독립되어 물질을 담고 있는 불변의 것일 수 없는 것입니다.
공간에 관한 불교의 이러한 입장은 절대공간을 부정하고 있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물질의 독립된 실체성을 부인하고 있는 ‘화이트헤드’ 의 유기체 이론의 학문적 가설과 하나의 맥락으로 서로 통하는 바가 있읍니다.
즉 기계론적 유물론에 반대하고 있는 ‘화이트헤드’의 가설에 의하면 현실은 둘레의 모든 조건과의 관계를 통해서 과정적인 계기(繼起)로서만 주어지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현실의 묘사는 실체•본질•성질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과정•기능•관계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2. 자연과 인간의 하나됨 (依正不二)
지금까지 우리는 다원론적인 인도사상가나 뉴우톤의 절대공간론과는 입장이 다른 불교의 공간관과 아인슈타인, 화이트헤드의 상대적인 공간이론 및 물질개념을 이야기하였읍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나 ‘화이트헤드’의 학문적 가설은 물질의 변화나 세계운동을 설명하는 데는 타당한 가설일지 모르나 우리에게 인간과 세계, 인간과 물질의 통일적인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읍니다.
본경에서 부처님은 당시 다원론적인 사상가들의 주장처럼 땅.물.불.바람.허공.마음의 여섯가지 요소를 들어 보임으로써 그러한 다원적인 모든 요소가 없지 않음(非無)을 보이고 있읍니다.
그러나 신흥사문들의 실재론적인 입장과는 달리 여섯가지 요소에 모두 실체가 없음(非有)을 밝히어 인간과 세계, 마음과 물질이 서로 분리된 존재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읍니다.
즉 우주의 실상(實相)을 마음의 진여문(心真如門)에서 보면 마음도 없고 세계도 없지만 마음의 생멸문(生滅門)에서 보면 마음과 세계, 마음과 허공은 무자성의 터전에서 서로 이루어 주고 서로 의지해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허공은 온갖 것을 실어주고 인간의 몸을 담아주고 있으므로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허공은 인간의 마음속에 드러나고 마음속에 떠오르고 있으므로 마음밖에 홀로 있는 그 무엇도 아닙니다.
용수보살의 중론송에 나타난 언어분석에 의하면 허공이라는 우리의 언어규정(相)과 규정되고 있는 현실로서의 허공자체(所相)는 따로 분리됨이 없이 동시에 서로 이루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허공과 물질이 모두 실체가 없으므로 물질의 끊임없는 변화와 세계의 쉬임없는 운동이 일어나는 것이며 자아와 세계,마음과 물질이 서로 실체가 없으므로 인간의 육체적인 움직임(身業)과 언어(口業), 인식(意業)이라는 실천적인 행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계운동은 인간과 따로 독립된 세계의 운동이 아니라 인간의 실천(業)을 이루어주고 있으며, 인간의 실천속에 나타나고 있는 세계운동인 것입니다.
수능엄경은 위와같이 세계운동과 인간의 실천이 서로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는 중도(中道)의 큰 뜻을 밝히기 위해, 물질구성의 네가지 요소(地.水.火.風.四大)와 허공이, 인연으로 생긴 것도 아니며(非因緣生: 실체적인 여러요소들이 쌓여져서 이루어진 것이 아님) 자연히 생긴 것도 아니라(非自然生:다른 조건이 필요없이 부라만과 같은 제1 원인이 스스로 나타나서 이루어진 것도 아님) 인간의 업(業)을 따라 나타나며 인간의 앓을 쫓아 드러난다고 하였읍니다.
그리고 다시 저 끝없는 허공이 깨달음의 성품에서 나온 바(無邊虛空 覺所顯發) 라고 하였으니 여기서 깨달음의 성품이란 주관적인 마음이 아니라 마음의 진여문(質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을 동시에 싸안고 있는 전체로서의 한마음(一心)을 말하는 것이며 육계(六界)가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닌 중도실상을 말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수능엄경의 교설이나 본경의 육계무아설에 의하면 인간은 결코 거대한 세계의 구조 속에 초라하게 갇혀 있고 무궁환 자연의 질서 속에 왜소하게 종속되어 있지만 않습니다. 오히려 자연과 세계의 실체성을 타파함으로써 세계초월의 길을 갈 수 있으며 세계창조와 역사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본경에서 설한 바와 같이 육계무아의 큰 뜻을 통달한 자유로운 인간이 세계를 해방해가는 거룩하고 장엄한 삶의 모습은, 무량수경(無量壽經) 가운데 법장(法藏) 비구의 정토건립의 교설로 나타나고 있읍니다.
정토교설에 의하면 우리들 범부들은, 육계(六界)로 표시되고 있는 인간과 세계구성의 제 요소에 실체가 있으며 나와 내 것이 실지로 있다는 어리석음(痴) 때문에 자아 중심적인 사고와 욕망(貪)에 사로잡혀, 끝없는 대립과 갈등(嗔)속에서 부자유와 얽매임의 세계(三界)를 꾸려가지 않을 수 없읍니다.
그러나 법장(法藏)은 밝은 지혜(智)로, 육계가 실체가 없음을 통달하여 중생과 하나된 대자비(悲)를 성취하고 정의로운 세계건설의 실천적인 의지(願)로써 고통없는 세계(極樂), 소외와 분열이 없는 진리의 세계(靜土)를 이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계가 실체없음을 깨닫고 보면 ‘내이름 열번만 불러도 모두 나의 나라에 태어나게 하겠다’는 법장의 본원(本願:48대원)이 중생의 번뇌와 무관하지 않으며, 십만억불토 머나먼 정토의 세계가 이 곳 고통의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러한 인식의 눈을 뜰 때 우리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의 나누어짐과 다툼을 뛰어 넘어서 우리들의 고난에 찬 역사를, 억누르는 자도 없고 억누름 받는 자도 없으며 따돌리는 자도 없고 따돌림 받는 자도 없는, 해방된 진리의 세계로 꾸려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화엄경은 중생을 위하는 크나큰 본원력(本願力)으로 세계를 정화하고 가없는 허공속에 국토를 건립하여, 고통 속에 빠져 있는 중생을 건져내는 불보살의 자비를 다음같이 이야기하고 있읍니다.
諸佛國土如虛空 無等無生無有相
爲利衆生普嚴淨 本願力故住其中
부처님의 나라는 허공같아서
평등의 자취도 없고 생김도 없으며
또한 다시 모습의 차별도 없네
삼계에 위 없는 부처님께선
오직 모든 중생들의 이익을 위해
널리 나라 깨끗하게 장엄하여서
다함없는 본원의 크신 힘으로
세계속에 더불어 살고 계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