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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첫 순교자 ?이차돈 성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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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이야기 - 편집실 1985년 04월 38호
우리나라에 최초로 불교가 들어 온 것은 고구려의 소수림왕 2년 서기372년에 전진(前奏)의 왕부견(符堅)이 사신의 자격으로 순도(順道)라는 스님을 보내면서 불상과 경문을 함께 보냈는데 이것이 근역(橫或)에 불교 전래의 시초가 된다.
그러나 신라는 소백산맥 아래 위치한 관계로 여러가지로 문물의 전래가 늦은 데도 그 이유가 있지만 일찍부터 섬겨 오던 조상신에 대한 신앙이 강했기 때문에 이방(異邦)의 종교인 불교를 강력히 반대하고 받아 들이지 않았다.
5세기 초 눌지왕 때 묵호자라는 스님과 아도라는 스님이 신라 땅 일선군(지금의 경산지방)에 와서 불법을 펴려 했으나 일부 백성들 사이에 신도가 생겼을 뿐 귀족들의 완강한 반대로 그 뜻을 펴지 못하였다.
그 후 150년이 지나 23대 법흥왕 때 양나라 무제가 향을 보내 왔다. 법흥왕은 사신이 가지고 온 향을 만져 보니 상서로운 냄새가 났다.
신하를 불러 놓고 「이것이 무엇에 쓰이는 것이냐」 하고 물으니 신하 가운데 사인(舍人) 벼슬을 하던 이차돈(異次頓)이 말하기를 「이것은 서역국에서 온 것으로 전부터 우리나라에는 일선군 사람 모례(毛禮)가 잘 알고 있었지만 모례는 이미 죽고 그 자손이 아직도 일선군에 살고 있사오니 그들에게 물어 보심이 좋을 것 같읍니다」하니 왕이 즉시 일선군에 사람을 보내 찾아보니 과연 모례의 집이 있었다.
늙은이 한 사람이 스스로를 묵호자라 하면서 사신과 함께 궁중으로 들어왔다.
이때 마침 왕녀가 병중에 있었다. 묵호자가 향을 피우고 불경을 읽으니 왕녀의 병이 쾌차 하였다. 그러므로 자연 왕이 불교를 좋아하게 되었고 차츰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국민들의 뜻을 하나로 뭉쳐 나라를 태평하게 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가 완강하였기 때문에 마음으로 깊이 고뇌하고 있었다. 이때 이차돈은 임금의 뜻을 헤아리고 임금에게 청하기를 「임금님 제가 임금님의 명령이라 하며 천경림에 절을 세우겠읍니다. 그렇게 되면 많은 신하들이 극심하게 항의할 것인즉 그 때 임금님께서는 왕명을 거짓으로 퍼뜨렸다는 죄로 저의 목을 베어 주십시요. 그러하오면 저의 죽음은 결코 평범하지 않고 기이한 이적(異蹟)을 보일 것인즉 이로써 불법을 흥포(洪布)하소서.
그러나 임금은 이차돈의 갸륵한 뜻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내가 불교를 펴려는 목적은 백성들을 복되게 하려는 데 뜻이 있거늘 어찌 죄없는 사람을 죽이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이차돈도 뜻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생명처럼 귀한 것은 없읍니다. 그러나 이 한 몸을 버려 길이 온 백성이 편하고 부처님의 법이 이 땅에 퍼질 수 있다면 이 한 목숨을 기꺼이 버릴 것입니다.
마치 저녁에 지는 해처럼 이 몸이 죽어지면 내일 아침 불법의 해가 찬란하게 솟아오를 것입니다. 어찌 옳은 일을 보고 목숨을 아끼리이까 하고 임금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천경림을 베었다.
그러자 여러 대신들과 일반인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결국 임금은 이차돈의 장한 뜻을 알면서도 중벌인 사형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드디어 사형을 집행하는 날이 왔다. 신하들을 비롯한 사람들이 이차돈의 마지막 모습을 보려고 구름 떼처럼 모였다. 이차돈은 태연하였다. 그리고 부처님께 기원드리기를 「이몸의 죽음을 자비로서 받으소서. 참된 진리를 위해 이 한 목숨 헛되게 하지 마옵소서」 하고 하늘을 향해 고축하였다.
그 순간 칼은 이차돈의 목을 봄날의 풀잎 베듯 베었다. 그런데 이것이 왠일인가 이차돈의 목에서는 흰 피가 한길이나 솟아오르고 천지가 진동하면서 꽃 비가 내려 형장을 수 놓았다 모든 사람들은 경탄하였고 그의 거룩한 마음에 눈물 적시었다.
그 후 그의 시체는 북악에 장사지내고 그의 명복을 위해 자추사라는 절을 세웠다.
드디어 법흥왕 14년 서기527년에 불교는 공인되었고 신라의 위대한 불교문화가 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