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려장(靑藜杖)를 던지며 합강정(合江亭)에 올라가니
동천(洞天) 명월(明月)에 물소리뿐이로다.
어디서 생학선인(笙鶴仙人)은 날 못 찾아 하느니
- 노강(盧江) 조명리(趙明履)
청려장 힘을 삼고 남묘(南畝)로 내려가니
도화(稻花)는 흩날리고 소천어(小川魚) 살졌는데
원근에 즐기는 농가(農歌)는 곳곳에서 들리네
-남파(南波) 김천택(金天澤)
청려장을 흩던지며 대자연을 찾아가는 너그러운 그들에게는 평화속에 감흥이 넘쳤다.
봄에 돋아난 명아주는 아무데서나 잘 자라지만 특히 황무한 들판이나 양지바른 곳에서는 쑥쑥 잘자라서 그 대궁이로 지팡이를 만들면 가볍고 매끄러운 데다가 튼튼하여 옛사람들이 지팡이로 잘 애용하였던 것 같다.
소꼽시절부터 발에 밟히던 명아주가 그토록 청아한 풍류인의 지팡이가 된다니 늘 신기하고 친근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한 스므해 전에 나는 그 명아주에게서 하나의 큰 법문을 얻었다.
그날 그것은, 내 눈엔 한 그루의 거목이었다.
새 교사를 짓기 위해 언덕으로 된 운동장이 깎여나가고 있는 마지막 낭떠러지 끝에, 느티의 풍도를 그대로 지니고 엄전하게 서 있는 나무가 있다. 그것은 한아름이 넘고 키는 2m 가까운 성숙한 명아주 나무였다.
출석부를 낀 채 쪼그리고 앉아 그 명아주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석양이 내리 비치는 늦더위였던가. 단풍이 든 듯이 불긋불긋한, 마름모로 둥근 잎들은 시방(十方)으로 뻗은 가지를 덮어 소담한 가쟁이는 아름다움과 풍요로움 그것이었으며, 또 근력이 넘쳐흘렀다.
이렇게 어른스러운 작은 나무를 그 후에도 별로 본 적이 없다. 요즘 억지로 애써서 거목(巨木)감을 왜소(矮小)하게 만든 분재나무가 아니다.
이것은 반대로, 작은 것이 자연의 조화 그대로 잘 자라서 하나의 아름다운 완성을 이룬 것이다. 하나의 생명의 완성!
나는 아득한 여로를 가는 그네가 되어 그 그늘에 쉬고 있었다. 크고 작은 것이라든가, 귀천의 분별은 간 곳 없고 오직 형언할 수 없는 경이와 감동 뿐이었다.
틈만 있으면 여행을 하고자 하던 갈망이 이후로 없어진 것 같다. 저 작은 우주가 바로 큰 우주인데 가지 않아도 간 것처럼 느껴진다.
노여워 하면서도 바라다보고, 기뻐하면서도 비쳐보이는 이 마음이, 저 명아주의 질긴 가지처럼 얻어나서 조화를 이루고, 나름대로 참한 완성을 이루고져 하는 서원.
뜻이 있는 우리 유정이야 어묵동정(語黙動靜)의 갈 길을 가릴 줄도 있는 것임을….
그날 그 감동은 흐른 세월에 바래인 채로 언제까지나 회게 남아있다.
과연 옛사람들이 청려장을 의지하여 선경(仙境)을 찾을 만도 했구나 싶다. 거목 아닌 거목. 그 어른스러움.
나의 늙음에서도 지팡이는 청려장이 잡혔으면 더욱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