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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佛光)의 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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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 유정자 1985년 03월 37호

수필가

법당 앞 산수유꽃 노오랗게 피어 비슬산에 삼월이 열리면, 실안개 피어 산봉우리를 넘어오고 대숲에 이는 맑은 바람은 솔내음 더불어 화장찰해(華藏利海)의 미묘한 음악을 연주할게 아닌가.
산사를 오르는 길목엔 왁자하니 피어날 개나리의 웃음이 들리는 듯하고, 실버들은 파릇하니 벌써부터 매무새를 다듬는 것 같다. 싸아하니 밀려오는 풀내음 짙은 도랑물 소리에 귀 기울이며 관세음 관세음 관세음보살. 어느듯 손에 쥐 염주알엔 땀이 배이고, 대웅전 앞에 서면 나는 나를 잊는다. 본존불의 티 없으신 미소에 빠져들어 천진한 웃음을 웃으며 그 넓은 가슴에 안기우는 아기가 된다.
관음재일, 미묘비구니 스님의 인과에 대한 법문을 새기며 돌아서는 대웅전 뜨락엔 싸늘한 하늘이 고뇌로 잉태한 빠알간 산수유 열매 몇 개가 달려있어, 바람의 침묵이 잠시 머문다.
어디서 읽었던가 「자성(自性)이 적멸궁(寂滅宮)」이란 말씀이 생각난다. 그 깊은 뜻이 깨달아 질것도 같은 적정한 산사의 아름다움이었다.
태중에서부터 불가의 인연이 있있음에도 멀리 떠나 떠돌다 부처님 전에 무릎 꿇어 합장한 지 오년,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주신 공덕은 너무나 컸다. 어둡고 답답한 무거운 나날 속에 관세음을 염하는 염주알은 그 알알이 타는 가슴을 식혀주는 묘약이었다.
지난 갑자년은 그 숱한 아픔 속에서 오직 그 분의 손길만이 나를 잡아주던 끈이었다. 딸애가 무사히 대학에 입학 할 수 있었음을 감사한다. 학력고사를 치던 날 오르던 산사의 길, 온 몸이 땅에 짖도록 절을 하며 관세음을 염하던 그 순간, 온갖 망상은 사라지고 밝고 평온함 만이 있었다. 내 전부를 기댈 수 있는, 우리의 귀한 품성을 긍정하고 자타일체를 확신할 수 있는 불법을 만났음이 얼마나 다행인가. 또한 오계를 받고 보살계를 받던 날 탐(貪)·진(睦)·치(痴) 삼독을 버리고 계(戒)·정(定)·혜(慧)를 닦아 잘못된 아상(我相)을 방하착(放下着)하여 청청무구한 불성의 개화(開花)를 다짐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불볕이 내리던 지난 여름, 화주책을 들고 이집처럼 다닐 때 같이 해주시던 관세음의 미소와 그 환희롭던 나날을 잊지 못한다. 모든 외계(外界)가 허환(虛幻)이며 오직 그 분과의 대화만이 살아 생동하던 그 시간들, 나는 모두를 포용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화주책은 한장 한장 채워졌으며 땅거미 짙어지는 도심의 아스팔트가 그 날엔 고향길의 잔디를 밟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세존이시여, 당신의 자비로우심으로 못난 여인의 까맣게 어두워 있는 자성을 밝혀 주옵소서. 하여 사욕없는 순진무구한 비원(悲顧)의 참여가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그렇게도 녹아 내리던 분지의 여름이 찰나에 지나가 버린 것만 같았다.
남해 보리암의 달밤을 사무치던 관음정근의 메아리며, 송광사 수련대회 참석시 사자루를 돌아 흐르던 폭포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것만 같다.
많은 아픔과 아름다움이 수 놓여진 갑자년을 보내고 조용히 정말 조용히 지내려 다짐했던 을축년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눈꽃이 불국사를 선경으로 장식한 날 나는 불국사미술관 안에 있었다. 눈발이 걷힌 창 밖의 절 도량은 은백으로 파아란 하늘 아래 동화같이 아름다웠다.
갑자기 “탁” 하는 소리에 색깔이 무척이나 예쁜 새 한 마리가 유리문을 부딛고 떨어져 피를 뿌리고 죽었다. 세마리 깨라고 했다. 유리에 색깔을 칠했으면 하고 원망스러웠다.
그날 골똘한 생각으로 온몸이 타고 있었다. 내리는 눈발을 그냥 맞으며 불국사에 을이라 갔으나 수정마냥 투명한 눈꽃의 순수함도 청운교, 백운교 위에서 바라보는 설경의 극치감도 오직 한가지 생각 속에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세존이시여! 이곳까지도 저를 위한 높은 법문을 주시나이까!」새 한 마리 몸 바꿈에 눈 어두운 자의 허망한 욕망의 벽이 무엇임을 깨우쳐 주신 그 오묘한 뜻을 생각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옴을 금할 수 없었다.
밖으로만 떠돌던 마음의 갈피를 내 작은 뜨락에 접어, 봄이 스미는 소리로 채우리라.
산사의 맑은 솔바람을, 향운 그윽한 정적을 내 뜨락에 가져와 무릎 꿇어 기도하는 작은 공간을 이루리라.
귀 기울이지 않아도 늘 그 분은 내게 얘길 해주시며, 찾아가 뵈옵지 않아도 지금 이 곳에서도 늘 나를 지켜보고 계신 것을.
오늘은 낯선 시간, 새로운 프로그램을 짜자.
하늘빛 물감을 넉넉히 찍어 산을 그리고 강물을 그리고 소리를 그려보자. 내 영혼을 파아랗게 닦아주고 내 육체를 햇솔처럼 감싸안아줄 소리, 소리를 그려보자. 그분의 음성을 그려보자.
하여 우리의 마음도 그려 넣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