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불교의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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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불교소개 - 김형희
1985년 03월 37호
필자는 불교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와 쥬네부에 2년 남짓 머물면서 유럽불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살펴 볼 기회를 가졌다. 유럽에 불교가 소개 된지 100여 년이 넘었는데 그들에게 불교가 어떻게 받아 들여지는가를 우리나라에 수입된 기독교와 비교해 본다면 흥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종교를 믿든 간에 그 종교생활에 있어서 합리적인 이해보다는 직관적 몰입과 기복적인 경향을 더 강하게 띠는 데 비하여 유럽사람들의 종교에 대한 태도는 이미 종교의 일반적인 특정이라고 할 수 있는 그 기복성을 탈피하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물질의 풍요와 사회 보장제도에 의해 이미 극대화된 물질의 혜택을 향수하고 있기 때문에 물질적인 기복의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들은 현대문명의 비리가 물질의 풍요로써만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복의 문제보다는 서구 물질문명에 의해서 소외된 인간의 본질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기독교가 거기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명확하게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그 해결책을 불교나 다른 동양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는 희망에서 불교의 인간중심적인 새로운 가치관에 고조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는 불교나 동양철학에 대해 모르면 지성인 측에 낄 수 없는 형편인 것이다. 마치 우리 젊은이들이 칸트나 니체를 모르면 지성인 행세를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불교는 지성인들과 젊은 층에서 많은 관심을 갖고 접근해 오고 있다.
불교를 믿는 방법이 여러가지 있겠지만 유럽의 불교를 두 가지로 나누어 본다면 학문적인 연구와 수행적인 면에서 관심을 갖고 있다고 보겠다. 기복성을 탈피한 그들에게는 염불불교(念佛佛敎)나 예식불교(禮式佛敎)는 거의 관심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기복성은 기독교로서도 층분히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학문적인 연구는 영국이 인도와 스리랑카를 식민지로 지배하던 당시에 유럽 동양학자들이 범어(梵語)와 과리어(palii語)를 직접 연구해 힌두교경전과 불교경전에 대한 놀랄만한 연구를 해놓았다. 특히 파리어로 된 원시경전(原始經典)은 유럽 불교학자들에 의하여 거의 출판·번역되어 있으며 영국에는 아직도 팔리성전연구회(pali text society)라는 단체가 이 사업을 계속 지속시키고 있다.
또한 필자가 관심있게 본 점은 유럽 동양학자들의 어학에 대한 박학성이다. 특히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유럽어 계통의 언어는 물론 범어나 과리어는 필수적이며 티베트어(Tibet語)와 한문 그리고 일본어에 능통하며, 언어의 학습을 학문의 기초로 보고 있는 것이다. 유럽의 불교 연구가 아직은 문헌학에 머물며 사상적 깊이까지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지금 우리 불교계가 한문경전에만 의존하고 있는 형편을 생각할 때 이러한 학문적 태도는 배워야 할 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남방불교의 원시경전이 거의 연구된 것에 비하면 대승불교인 티베트 불교나 선불교(禪佛敎)는 아직도 연구의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고 본다. 선불교는 유명한 일본의 불교학자인 스즈끼씨의 영향이 크게 작용되었는지는 몰라도 중국이나 우리나라를 제쳐놓고, 일본이 대표적인 불교국가로 소개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또 괄목할만한 것은 티베트불교의 융성함이다. 왜냐하면 티베트불교는 달라이라마가 많은 승려들과 함께 인도로 망명해 온 이후, 그 중 일부가 유럽으로 건너와서 정착하면서 포교를 하여 티베트불교에 대한 관심은 정점 증가하고 있다. 어떤 신도는 자기 집을 사원(寺院)으로 시주할 만큼 신심이 대단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달라이라마는 불교의 교황처럼 존경을 받는다. 작년에 달라이라마가 유럽을 방문하여 법문(法門)을 하였을 때 너무나 인과가 몰려 건물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건물밖에 확성기를 설치해 놓고 밖에서 법문을 들어야 할 정도이었다.
유럽불교는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유명한 불교학자들에 의해 학문적인 연구가 발달함에 비해 요즈음은 젊은 층에서 실질적인 불교신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불교학자라고 반드시 불교신자는 아니다. 그 동안 불교에 대한 많은 서적이 출판되었으나 실질적으로 불교를 종교로 받아들여 불교신자가 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런데 요즘은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불교신자가 되어 불교윤리관에 입각한 생활을 하며 실질적인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실질적 수행으로는 특히 자신의 심성(心性)을 관조(觀照)하는 좌선수행법(坐禪修行法)에 관심을 갖고 있다. 유럽불교신자는 거의 「불교신자는 좌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나에게 질문하기를 「한국불교신자는 좌선을 얼마 만큼하며 어디서 하느냐」고 묻기도 하고, 한국 불교신자는 자기네들한테 비교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한다. 왜냐고 물었더니 한국에는 자기네들 보다는 많은 선지식들과 절이 많기 때문에 공부하기에 좋지 않느냐는 것이다. 정작 우리나라의 기복신앙을 주로 하는 불교신자를 생각할 때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점은 유럽 불교신자한테 배워야 할 점인 것 같다. 우리나라 불교신자도 기복신앙에서 벗어나 진정 자기를 탐구하는 선불교(禪佛敎)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우리나라는 엄연히 전통선맥(傳統禪脈)이 존재하며 여러 선지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복신앙에 연연한다면 부처님의 참뜻을 잃어버리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자기의 금을 버리고 남의 유리조각을 줍는 일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유럽에서는 여러 전통의 불교가 소개되어 있듯이 좌선법에도 여러가지가 소개되어 었이다. 참선법(參禪法) 외에도 남방불교의 좌선법인 내관(內觀:Vipassana) 이라고 하는 수행법과 티베트불교의 밀교 수행법을 배울 수 있다. 이것들은 각각 전통에 따른 사원에서 배울 수 있는데 참선법은 일본이나 한국의 사원, Vipassana는 태국·버마·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의 사원에서 배울 수 있으며 밀교(密敎)는 티벨사원에 각각 전문적으로 수행한 승려들에게서 직접 배울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사원이나 유럽인들에 의해서 창설된 불교단체에서는 매년 방학을 이용해 집중적인 수행을 위하여, 도시를 떠나 시골에 커다란 별장을 빌려 선지식(善知識)을 초청하여 일주일 내지 2·3주일 동안 엄격한 시간표를 작성하여 승려들처럼 전문적으로 좌선만을 수행한다. 이러한 대회가 있을 때마다 위로는 영국이나 스웨덴에서부터 밑으로는 이태리 등 각 유럽국가 젊은이들의 신청이 쇄도하고 있다.
특히 Vipassana수행법은 유럽 불교신자들 사이에 많이 행해지는 관법(觀法)으로서 이 관법은 초심수행자들이 간단하면서도 쉽게 습득할 수 있다. 그 방법은 처음에 숨을 코나 배에 집중시키면서 몸에 대한 감각을 살펴는 것인데, 이 때 몸의 감각이 좋거나(樂), 싫거나(苦), 무기(無記)이든지 그 감각을 분별이나 비판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관찰하는 방법인데 비교적 쉽게 삼매에 도달활 수 있다고 한다. 이 Vipassana에 비해 간화선(看話禪)이나 관상법(觀像法)은 어렵다고 한다. 이와같이 유럽의 불교는 아시아 각 전통 불교가 다 소개되어 있어 자신의 취향에 따라 배우고 수행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아직 남방불교나 티베트불교가 소개되어 있지 않아 다른 전통의 불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배울 기회가 없는데 비해 도리어 유럽에서 다른 전통의 불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유럽이 세계 여러 불교문화를 치우친 선별의식이 없이 모두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어느 학자의 말대로 동양이 자기 정신문화에 대한 자긍적인 재창조작업을 계속하지 않는 한 불교를 서양에서 다시 배워야 할 날이 올 것이라는 이 말은 그냥 웃어 넘길 수 없는 말임을 느꼈다.
그리고 또 필자는 가끔 한국을 방문한 유럽사람들로부터 이러한 질문을 받는다. 「한국에는 왜 그렇게 교회가 많으며 또 기독교신자가 급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데 이유가 무엇이냐」고. 그리고 한국은 불교나 도교·유교·무속신앙 같은 좋은 전통적인 종교를 가지고 있는데 왜 하필 이제는 우리가 쓰다 버린 서양의 귀신이 뭐 좋다고 그렇게 믿느냐? 한국의 전통이 점점 사라져 버리는 것은 무척 애석한 일이다」라고 말할 때 무엇이라고 대답을 해야 좋을 지 몰라 당혹함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이 문제는 나뿐아니라 우리 모두가 생각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외국생활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보배를 재발견 할 수 있었다는 점은 큰 수확이었다. 그리고 불교가정에서 태어나 불교인으로서 생활해 온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제 자신의 보물을 발견했으니 이것으로 무엇을 만드는가는 우리 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보물의 가치를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만들어 모든 사람이 즐거워 할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불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 하겠다. 그러기 위하여 모두 열심히 정진하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