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설〉
십팔계(十八界)설은 인식주체(根)와 인식대상(境) 그리고 인식자체(識)가 공성(空性:sunyata)의 바탕 없는 바탕(空空)에서 서로 의지하여 발생하는 것임을 보여주었읍니다.
곧 식(識)은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상호반응 과정 속에서 나타나지만, 주체와 대상은 다시 식(識)이라는 현실경험의 장(場:識自證分) 속에 구체적인 경험내용(見分相分)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能取及所取 一切推是心, 榜伽經).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객관대상이란 이미 인식속에 나타나고 있고 인식내용으로 구성되어지고 있으므로 인식주체 밖에 실재하는 그 무엇 (物自體, Ding an sich)이 아닙니다(非有).
그러나 객관대상은 상대적인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면서(任持自體) 인식내용을 이루어 주고 있으므로(非無)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대상을 순수하게 주관적인 정신의 구성이라고만 이야기한다거나 허무의 심연속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부처님이 밝히신 생명의 진실에 부합되지 못한 것입니다.
중국에서 불교사상의 영향을 받아 유교의 새로운 해석이론(新儒學:neo-Confucianism)으로 등장한 주자성리학 (朱子性理學)은 사물 사물이 모두 초월적인 궁극원리를 갖추고 있으므로(物物各具一太極)사물에 갖추어진 궁극원리를 탐구함으로써 절대의 성품에 이를 수 있다(窮理盡性)고 합니다.
그러나 이학(理學)의 입장은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실재가 현상 뒤에(性卽理) 설정되어지고(Joseph.R.Levenson;淸代實學의 科學性 참조) 객관대상(格物에 있어서의 物)이 마음과 독립되어지므로써(?友蘭:中國에는 왜 科學이 없있던가 참조) 현상(心)과 본체(性), 사물에 대한 탐구(格物)와 바른 인식(致知) 사이의 이원성을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鄭寅普:陽明學演論) 되어지고 있읍니다.
이에 반하여 양명심학(陽明心學) 은 마음을 초월한 궁극적인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心卽理)고 하며, 사물도 마음속에 구성된 현상이라고 해석함으로써 현상과 본체, 주관과 객관, 격물(格物)과 치지(致知) 사이의 이원성을 극복하였으나(鄭寅普 上記書 참조) 지나치게 마음만을 강조함으로써 대상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태도를 결여한 주관적 관념론으로 비판되고 있읍니다.(J.R. Levenson 上記書)
불교에서는 현실경험 세계로서의 십팔계(俗諦)를 떠나 진실의 세계(法界:眞諦) 가 따로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학(理學)에서처럼 현상을 초월한 궁극원리를 내세우지 않읍니다. 또한 십팔계는 서로 의존하여 발생하는 것이므로 양명심학(心學)에서처럼 세계를 주관적인 마음속의 현상으로만 파악하지도 않읍니다. 십팔계설에 의하면 존재차원으로서의 세계(六境)는 언제나 인식주관에 의해서 의미화 되어지고 인식의 자기구성(六識의 相分)으로서만 과악되어지지만, 존재 차원은 의미차원에 소외되거나 한정되어지지 않고, 삶의 영원한(不斷) 의미화의 과정(不常)속에 새롭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읍니다.
즉 십팔계의 온갖 법은 그 모두가 실로 있음이 아니므로(非有) 서로 만나 화합하고, 그 모두가 실로 없음이 아니므로(非無) 서로 반응하여 새롭게 규정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근·경·식이 서로 만나 화합하여(三事和合:觸),대상을 받아들이고(受) 인식 내용으로 구성(想)토록 하는 마음작용을 본경에서는 부딪침(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부딪침은 대상을 가려 아는(了別) 식자체(心王)와 독립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앎이 일어날 때 항상 따라 일어나서(偏行), 느낌을 일으키는 마음작용(心所)인 것입니다.
느낌(受)은 대상을 받아 들여(領納) 모습을 구성토록 해주는 마음작용이니 주관의 집착에 따라 그 느낌은 괴로운 느낌 (苦受), 즐거운 느낌(樂受), 무덤덤한 느낌(捨受)의 세가지로 나타납니다.
다시 세가지 느낌으로 받아들여 구성된 대상에 대해서 중생은 괴로운 것은 버리고 즐거운 것은 취하는 것이니 즐거운 것(別境)을 취해 붙드는 마음작용을 욕망(愛)이라고 합니다.
이 육근, 육경, 육식, 육촉(六觸). 육수(六受). 육애(六愛)의 법은 흔히 육육법(六六法)이라는 법체계로 함께 묶여져서 설명되고 있읍니다. 그리고 아함경에서는 이 육육법(六六法)이 본경의 느낌(受), 욕망(愛) 대신에 육상(六想:모습을 취해 구성)과 육사(六思:뜻으로 지어감)가 대치되어 나타나는 곳도 있으나 모두 육식(六識)에 따라서 일어나는 심소 (相應心所)법을 나타내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본 경에서는 촉,수,애를 인연하여 십팔계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십팔계를 인연하여 촉,수,애가 생긴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니 육육법은 십팔계와 다른 법체계가 아니라 십팔계설을 부연하여 대상이 인식 주관속에 어떤 모습으로 구성되어지는가를 표시하는 법체계 입니다.
특히 인식주관이 대상을 받아들이는 작용인 느낌은 중생의 대상에 대한 망집의 방향을 나타내주고 있으니, 그 중 괴로운 느낌과 즐거운 느낌은 사물에 대한 실재의식(有見)에 바탕을 두고 있고 무덤덤한 느낌은 사물에 대한 허무의식(空見)에 바탕을 두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끝없이 고락(苦樂)으로 치달리는 대상에 대한 실재의식도, 도외시와 무관심으로 나타나는 허무의식도 십팔계설이 밝혀준 법의 진실에 맞지 않는 것이며 법의 진실에 맞지 않으므로 참된 해탈의 길이 아닌 것입니다(菩提心不名有記. 不名無記 : 天台宗 憲思禪師隨自意三妹)
이러한 실재의식과 허무의식이 극복되어질 때 주관 객관이 하나도 아니고 다름도 아닌(不一不異) 본질적인 관계성이 삶의 현장 속에 현전되어지는 것이니, 주객의 신비적인 합일에 안주하려는 종교가의 삼매나 기도 속에도, 주객의 이원성을 극복하지 못한 과학주의자의 사회과학의 제원리(paradigm)속에도 참된 인간구원의 길은 존재하지 않읍니다.
오직 세계에 대한 우리들의 어떤 의미화나 우리가 설정한 어떤 패러다임일지라도 그것들이 우리 인식내부에 고착된 틀을 형성하지 않을 때(知而無知), 세계는 전체적인 조망속에 열려지는 것이며, 그러한 전체적인 조망속에서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의미화와 보살핌을 쉬지 않을 때(無知而知)세계는 인식주관에 소외되지 않는(不二), 지지않는 진리의 꽃(常寂光土)으로 항상 새롭게 피어날 것입니다.
그러한 때 우리는 존재에 의한 의식의 오염과 의식에 의한 존재의 제약을 깨뜨리고 진정한 인간 해방을 구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화엄경은 실재의식과 허무의식으로 표출되어지는 모든 환상을 떠날 때 대자유의 삶이 구현될 수 있음을 다음같이 이야기하고 있읍니다.
若住於分別 則壞淸淸眼
愚痴邪見增 永不見諸佛
치우친 분별의식에 머무른다면
깨끗한 진리의 눈 뜰 수 없도다.
어리석고 삿된 견해 더욱 늘리어
영원토록 부처님을 볼 수 없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