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이미 옛산이 아니고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수상 - 일장
1985년 02월 36호
지난해 가을, 나는 모처럼 한데 모여 합류된 몇몇 벗들과 함께 지리산 등반을 할 기회가 생겼다. 그 동안 만행 길에 산 둘레둘레로 칠불이니 화엄사 등등은 여러 번 들른 적이 있지만 이번 처럼 상봉을 목표로 올라가 보기는 겨우 두번째로 처음은 열네 살 적의 어린 행자 시절이었고 20수년만에 이제 두번 째 오르는 것이다. 사실 어릴 적에 있은 등반은 모시는 스님을 따라 산청에 있는 대원사에서 출발하여 상봉에 오를 수 있었는데 훗날 알고 보니 그 코스가 상봉을 등반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코스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봐도 가는 곳마다 풍성하던 고사리, 떡치, 고비, 곤달비 등 수없이 많은 산나물과 눈부시게 고운 철쭉이 지천으로 피어 있어 들에서만 살아오던 나로서는 그저 보이는 것마다 신기했고 꼬불꼬불 끝없이 이어지는 산길하며 넘어도 넘어도 새롭게 나타나는 우람찬 산등성들이 흡사 가슴 설레이는 추억처럼 다가오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 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지리산 하면 뭐니뭐니 해도 그날 땀이 범벅이 된 채 드디어 천왕봉 정상에 올라섰던 그 순간의 벅찬 감격을 잊을 수 없다. 때마침 장엄한 낙조는 하늘과 땅이 맞닿은 아득한 저편을 빙 둘러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우뚝 솟은 정상의 바위아래 아담하게 만을 쌓고 어느 누가 쪼아서 다듬었는지 한없이 평화스런 모습의 석상 두어 개가 석양의 노을 빛에 듬뿍 물든 모습으로 나를 곧 품에 안을 듯 거기에 모셔져 있는 게 아닌가 또 한 켠에는 천왕봉을 찾아오는 등반객의 유숙을 위하여 바위벽을 의지해 여남은 명이 쉴 수 있도록 움막을 엮어 놓은 곳이 있었다. 그 움막을 지키며 사시던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의 말로는 그 석상이 단군의 모친인 천왕모와 단군할아버지의 상이라고 설명하여 주어 어린 마음에도 그 산천의 장엄함과 그 석상이 거기에 모셔져 있는 어떤 의미에 감읍되어 오래도록 그 품속에 안겨들 듯 젖어 있었다.
아 우리네 먼 조상들은 그 어떤 감사의 정과 염원의 뜻으로 이 고봉정상 하늘과 맞닿은 곳에다 정으로 쫓고 다듬어 소박하고 엄숙한 우리의 혼을 빚어 모셨느니, 오랜 세월 비바람에 그 섬세하던 선과 굴곡은 마모되고 이끼 끼어 뚜렷한 형체 비록 무디어졌으나 오히려 묵묵한 모습으로 의연히 견디며 이 나라 만 대의 백성들을 지키고 보호하여 주신 것이다. 감성조차 미숙한 어린 나이에 속 갚게 무엇을 느꼈으랴만 그러나 왠지 형언못할 설레는 마음으로 적막한 정상의 밤을 뜬눈으로 세우고 맞은 그 이튿날의 장엄한 일출, 통천문 사이로 내려다 보이는 끝없이 펼쳐진 운해의 저 편에 하늘인 듯 땅인 듯 또는 물인 듯 분별못할 그 속에서 불끈 퍼져오는 짓붉은 햇살을 온몸 속속들이 받으며 벅찬 희열에 길 재촉하던 일행 어른들의 고함소리도 미처 들리지 않던 그때 그 아침은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이제 장년이 된 나는 그 때의 작은 가슴으로는 도저히 다 덤을 수 없었던 벅찬 흥분들을 다시 듬뿍 느껴볼 양으로 이번엔 제법 등산화까지 신고 한걸망 중식까지 마련하여 나선 것이다.
때마침 하늘은 한없이 맑다 못해 쪽빛이고 온 산은 바야흐로 불타듯 찬란한 가을인데 다만 그사이 세월이 흘렀는가, 산길이라도 제법 사람 다닌 흔적으로 길목마다 요란한 표지판 덕분에 길 앓을 염려는 없어 다행이었지만 예와는 달리 처처에 널려진 산에 어울리잖는 쓰레기 더미들-흡사 모진 전쟁이라도 치른 듯, 이 크고 장엄한 산천이 속속들이 유린당해 처참해진 모습으로 누워있어 왠지 부끄럽고 송구한 마음은 오늘 이 산을 오르는 나만의 느낌일까. 「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이 아니라」는 옛 노래가 있지만 그 동안 강산이 두어 번 변했을 만큼 긴 세월이 흐른 탓인지, 정상에 올라서 본 모습은 완연히 산은 옛산이 아닌 바위마다 등성이마다 글자 그대로 폐허의 모습이었고 더구나 어릴 적 내 작은 가슴을 가득 메워 주었던 천왕모의 소박한 석상은 어디 쯤이었는지 그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었다. 사람의 손길이란게 이토록 모질 수 있을까. 아래 산장 주인의 설명인즉 몇 해전 모 종교단체 학생들이 올라와서 우상을 타파해야 한다는 구실로 무참히 깨트려 굴려 버렸다하니, 악 이미 핏줄도 선조도 고향도 다만 믿음이란 허구하나로 그토록 짓밟아 팽개쳐 버릴 수 밖에 없는 우리네 후손들이었구나. 다시 돌아와 산을 향하고 앉아 능선을 바라보고 있건만 참으로 산은 이미 옛산이 아니나 산골짝을 적시며 흐르는 물소리만은 옛처럼 한결스럽다.
「인간의 번잡한 일 아니 맏기시고 다만 말없는 강산만 지키게 하시도다」라고 한 옛노래처럼 한결같은 물소리 들으며 매양 호젓한 산 그림자처럼 살아가지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