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설〉
부처님께서는 십이처설의 명료한 언어구조적 설명을 통해서, 식(識)이 주관적인 육근(六根)을 의지해서 그리고 객관적인 육경(六境)을 반연해서 얼어나는 것임을 보이셨읍니다.
이제 십팔계(十八界)설은, 섭이처에 여섯가지 앎의 작용(六識)을 구체적으로 표시해줌으로써, 능히 주체적으로 대상을 반연하는 마음 자체(能緣心體)의 연기구조를 나타내고 있읍니다.
즉, 섭이처설에서는 주관(根)과 객관(境)이 서로 마주하여 일으키는 식(識)의 수동성·반영성을 더 강조하고 있고 십팔계설은 대상을 가려 아는 식 자체의 능동성·자발성을 더 분명하게 지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함경에서는 식 자체가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반영(反映)으로서 나타나고 있음을 보이기 위해 ‘눈과 빛깔을 인연으로 하여 눈의 식이 생긴다(緣眼色生眼識)’고 이야기하고 있고, 다시 식이 대상에 대한 주관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앎의 작용(了別)이며 구성의 작용(取像)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눈이 빛깔을 인연하여 눈의 식이 생긴다(眼緣色生眼識)’고 표현하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십팔계설에 의하면 식(識)은 세계(六境:제 8식의 相分)의 반영(反映:相分→見分)이면서, 세계는 식(識)의 자기표현인 것(現像:見分→相分)입니다.
다시 말하면 식 자체는 여러가지 조건에 의해서 그리고 성품 속에 갈무려진 종자(種子:親因緣)에 의해서 나타나는(因能變) 의타기의 모습(依他起相)이지만, 온갖 것은 다시 식 자체(自證分) 속에 알고(見分) 알려지는 것(相分)으로서 드러나는 것(果能變)입니다.
즉 식(識)은 여섯가지 대상(六境)을 소연연(所緣緣:반연하는 바)으로, 다섯가지 감각기관(五根)을 증상연(增上緣:도와주는 바)으로 하여 얼어나므로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非自作).
그러나 식자체분의 종자를 친인연(親因緣:직접 원인)으로, 현행(現行:일어나고 있는 생각)을 등무간연(等無間緣:이어주는 바)으로 하여 일어나므로 남이 지은 것도 아닙니다(非他作).
또한 식을 일으키는 모든 조건들이 독립된 실체가 없으므로 그 모두를 합한 것도 아니지만(非自他作:空) 모든 조건들을떠나서 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非無因作:假).
육근, 육경, 육식은 공성(空性)의 터전에서 서로 의존하여 발생하는 것이므로 온갖 것(十八界:五位百法)은 식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읍니다(萬法不離識).
그러므로 후대 무착, 세친 등 대승보살에 의해서 천명된 유식(唯識)의 교설은 근본불교와 유리된 어떤 법체계가 아니라, 그 시대의 논리에 입각한 십팔계설의 새로운 해석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유식불교의 7·8식 설은 십팔계에 없는 새로운 식(識)의 이론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근본불교의 의근(意根)을 유식에서 제 8식의 견분이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니, 이 8식의 견분에 아집을 내면 그것을 제7말라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제6식과 7식의 범어어원은 모두 manas이다).
또 십팔계의 온갖 법이 서로 단절되지 않은 하나의 터전 속에 사무쳐 있음을 제8아뢰야식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니 유식의 교설을 주관주의 내지는 심층심리로 해석하려는 일본학자들의 그릇된 견해(似比量)는 과감히 배척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식은 연기이므로 공한 것이요, 공함으로 연기되는 것이므로 유식연기(唯識緣起)를 주장하는 법상(法相)의 뜻과 유심성기(唯心性起)를 제창하는 법성(法性)의 길이 둘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기(依他起相)로서의 의식과 존재에 실체성을 인정하게 되면 우리들의 삶은 부자유와 고통 속(遍計所執相)으로 전락되어지지만, 망상과 집착만 여의면 십팔계가 그대로 해탈의 법계(法界:圓成實相)가 되는 것이니 화엄경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읍니다.
身心意平等 內外皆解脫
永劫住正念 無著無所?
몸과 마음이 모두 다 평등하고
주관 객관이 해탈의 법계로다
여래께선 바른 생각에 길이 머물러
집착없고 얽매이는 바가 없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