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화엄경 보현행원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부처님 말씀, 일대시교(一代時敎) 전체를 경·율·론 삼장(三藏)이라 하지만, 이것을 수행면으로는 계·정·혜 삼학(三學)이라 하고 선·교·율로 나누어 공부 하게 됩니다.
물론, 이 세가지는 필경에는 일체(一體)가 되는 것이지만, 첫째, 계율이라 하는 것은 불자칠중(七衆)이 각기 받은바 계법으로 분한(分限)에 따른 자신의 행지(行止)를 바르게 다지는 것입니다. 몸으로는 불살도음(不殺盜淫) 등의 행동질서와, 입으로는 네가지 망어(妄語)를 않는 등 언어의 질서와, 생각으로는 탐·진·치를 멀리하는 등의 정신질서를 바로잡아 신·구·의(身·口·意) 삼업 을 조섭(調攝)해야 하는 것입니다.
계율은 마치 삼층누각에 기초가 되는 일층과 같아서 「계로 인하여 선정이 생기고 정으로 인해서 지혜를 이룬다」고 한 것입니다.
불자가 된 이는 누구나 이러한 계율을 준수하고 이것을 생활화하여 항상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살피고 조심해서 방일(放逸)을 멀리해야만 합니다. 만일 계행을 지키지 않고 무시한다면 이 사람은 벌써 불자의 자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계행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인과를 생각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악도(惡道)를 불러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웃으며 업을 지었다가 울면서 그 과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불자들의 계법은 중생의 번뇌와 그에 따른 업을 청청하게 하여 해탈의 길을 보호하는 대방편인 것입니다.
번뇌(煩惱)가 다함이 없기에 한량없는 업(業)을 만들고, 그 업을 따라 과보(果報)홀 밤는 중생이 끝에 없어서 허공세계가 존재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중생들은 인·연·업·과(因·緣·業·果)의 법칙대로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로 자작자수(自作自受)의 업보상속(業報相續)을 거듭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사 백천 겁의 긴 세월을 지낸 뒤라도 자기가 지은 업은 없어지지 아니해서, 인연이 마주칠 때, 반드시 그 과보를 다시 받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과를 깊이 믿고 계행을 청정하게 행하는 사람은, 불법중에 깊숙히 들어갈 수 있는 불자인 것입니다. 옛사람의 말씀에, 「산하대지와 사생고락(死生苦樂)이 내 마음의 조작이라. 콩 심어 콩이 나고 팥 뿌려 팥 거두니, 인과응보가 몸 가는데 그림자요 소리에 울림이라」하였고, 「눈 깜박하는 결에 마음에 이는 생각이 천만겁에 생사고락의 씨가 된다」 하였으니, 인과는 정말 두려운 것입니다.
다음에는 신심과 발심, 즉 보리심을 발해야 합니다. 모든 종교가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불교에서는 신앙심(信仰心)과 신심(信心)이라는 말을 차원이 다르게 구분해서 쓰고 있읍니다.
신앙심은 부처님께 의지하여 소원을 비는 마음입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시여 ! 굽어살펴 주옵소서.」
하고, 전심전력으로 지성을 다해서 기도하고 염불 주력(呪力)하는 곳에 불심광명은 높은 산봉우리를 먼저 비추듯, 중생심수(衆生心水)가 맑아질 때 구름이 걷히고 나타나는 달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감응도교(感應道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린이가 부모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장성한 사람들은 자기의 의지대로로 자기 능력을 키워야 하듯이, 신심을 성취시켜야만 합니다. 신심이라 하는 것은, 장부자유충천기(丈夫自有衝天氣)라 하듯,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임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마음 밖에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오직, 기쁨과 즐거움 뿐인, 대자유 대자재의 안심입명과 무심삼매(無心三昧)만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신심을 만드는 방법이 바로 참선, 또는 관행(觀行)인 것입니다. 「고요히 앉아 내 마음을 궁구(窮究)하니. 내게 있는 내 마음이 부처가 아니면 무엇인가?」 한가지 공안(供案), 즉 화두(話頭)를 간택하여 염도염궁무렴처(念到念窮無念處)하는 것입니다. 단단적적(單單的的)한 일단진심(一段眞心)이 확철대오(廓徹大悟) 성불작조(成佛作祖)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단진심은 오로지 간절한 마음 하나로 화두를 생각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이 골수에 사무치고 전신에 사무쳐 전신골수에 오직 한마음 뿐이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되어 버리려 해도 버릴 수 없이 걸음 걸음에 일념이고, 생각 생각에 일념 뿐인 상태에서 침식을 돈망(頓忘)하고 무심(無心)이 저절로 되면, 일념이 곧 만년이요, 만년이 곧 일념이며, 영겁이 원융하여 몸도 없고 집도 없고 하늘도 없고 땅도 없어 다만 한 조각 광명 뿐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본심신력(本心信力)이 견고하고 부동심(不動心)율 허공같이 성취하므로 얼굴에서는 빛이 발하고 몸에서는 향내가 나는 듯 하며, 입을 열면 남에게 기쁨을 주고 가는 곳마다 항상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자비심을 품었으므로 미워함이 없고 청정행을 닦았으니 거짓을 모릅니다. 오욕(五欲) 번뇌를 멸한 사람은 하늘이 공경하고 송경염불하는 이는 선신이 옹호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바로 보리심을 성취하는 공양인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아직 중생이라는 병을 앓고 있읍니다. 중생들의 한량없는 고통이 보이고 있읍니다. 어서 어서 대지혜를 완성하여, 중생 제도의 대작불사를 이룩해야 하겠읍니다. 중생의 고통을 물질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근본적인 것은 「돈」보다 「도(道)」가 더 중한 것이고 「도」라는 말은 바로 진리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깬 사람」이라면 중생은 「꿈속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니, 우리의 신심이나 신앙심이 생시에 지극하고 간절했다면 잠자는 꿈 숙에서도 반드시 일여(一如)함을 얻어야만 할 것입니다. 꿈과 생시가 둘이 아닐 때, 기도에 가피력을 성취해서 중생의 고통을 덜지 못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화두 일념도 이와 같이 여여(如如)하다면 누가 생사의 나루를 건너 해탈하지 못하겠읍니까?
꿈속에서 얻는 가피력을 몽중가피(夢中加被)라고 합니다. 불보살의 신통도안(神通道眼)은 언제나 어디서나 법계(法界)에 충만하고 계시니, 기도중 꿈속에 뚜렷한 서상(端相)을 보는 것은 부처님의 「몽자재 법문(夢自在 法門)」이라는 것입니다. 서몽(瑞夢) 같은 것이 없더라도 마음이 즐겁고 흐뭇하고 자신있는 향상(向上)을 보이는 것은 명훈가피(莫熏加被)를 얻음이니, 쉬지 않고 꾸준히 한 우물을 파야만 합니다.
또 기도하고 홀연히 성취된 기적적인 사실이 있기도 합니다. 이것은 마치 오랫동안 필름에 녹화되었던 나쁜 그림이나 소리가 기계의 작동으로 일시에 소실되고, 좋은 그림이 새로 재현되어 나오듯이, 다겁생래(多劫生來)의 업장(業障)이 녹아짐에 죄멸복생(罪滅福生)하고 복지심령(福至心靈)하는 현상이니, 이것을 현현가피(現顯加被)라고 합니다. 기도하는 목적은 이러한 세가지 가피력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요행수를 바래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한 신앙심의 축적으로 이룩된 지성심이 결정인 것입니다.
참선하는 화두공부에는 삼분단(三分段)으로, 증험해 볼 수가 있읍니다. 큰스님의 게송에,
日間浩浩常作主하고 夢裡明明恒如一하여도
正睡着兮便漢然하면 塵劫生死苦奈何오
평소에 화두가 간단(間斷)이 없고
꿈속에도 분명하게 여얼하여
도장이 꼭 들었을 때 막연하다면
진겁의 생사고를 어떻게 해탈하랴
고 하셨읍니다. 또, 다른 큰스님께서도,
漸得寤寐一如時에 只要話頭心不離니라
於此에 莫生喜悲心하고 須參本色永決疑이다.
자나 깨나 한결같이 되어갈 적에
화두를 더욱 더 놓치지 말라
기쁨이나 슬픔이나 생각을 내지말고
선지식을 찾아서 인가(印可) 받을지니라.
라고 하셨융니다.
우리는 온종일 진세(塵世)에 묻혀 요요(擾擾)하고 있읍니다. 하루 해가 넘어가면 또 잠자리에 듭니다. 잠은 죽음의 사촌이라 했으니, 낮에는 살고 밤에는 죽는 셈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섬분단·삼종가피로 가는 과정에 또 한가지 방편(方便)이 있읍니다. 그것은 날마다 잠들기 직전에 「내가 몇 시에 얼어나겠다」고 생각하고 잠들면 꼭 그 시간에 깨어지듯이, 잠자리에 들면서 일심으로 화두나 주력을 응용해 버릇하면 잠재의식 속에 암시되어, 이것이 공부에 일조가 될 수도 있읍니다.
을축년의 신정은 벌써 지났고, 곧 구정이 다가오고 있읍니다. 우리 모두 이름만 불자가 아닌, 세가지 법공양에 상응하는 참 불자가 되어 봅시다.
편집자주 : 제방 선원의 조실스님을 모시던 「염화실의 미소」는 지난호로 끝을 맺고 다음 37호부터는 조계종 종정이시며 해인총림 방장스님이신 성철큰스님의 법어를 연재하겠사오니 독자님들의 많은 성원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