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한민족(韓民族)의 고유년호(年號)와 주체성(主體性)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특집시론 - 소허 1985년 01월 35호
“제가 남이 아닌 것과 남이 제가 아닌 것을 아는가? 이것이 곧 ‘얼’ (정신·넋·혼)이다. 무엇을 한다고 하자 저로서 하고, 무엇을 아니한다고 하자 저로서 아니하고, 무엇을 향하고 나간다 하자 저로서 나가고, 무엇을 바란다 하자 저로서 바라야, 저를 제가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닌가? ‘저는 저로서’가 이른바 ‘얼’이니, ‘저는 저로서’의 그 ‘얼’은 가깝게 일민족(一民族)으로부터 크게 전인류 내지 천지만물에 이르기까지 일체(一體)인 것이니… 그러면 우리의 5천년 간 척주(脊柱)되는 그 ‘얼’은 과연 어디에 존재(存在)하였던가?” (인용자 주(註):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爲堂 鄭寅普의 「5천년간 朝鮮의 얼」에서)
세상의 온갖 것에 뿌리가 있는 법이다. 우리에게도 민족의 시작이 있고 그 뿌리가 있다. 그 기원(紀元)이 있고 역사가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뿌리를 잃어가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의 각성을 촉구하는 일련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음은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 것」을 확인하는 전통문화·사상·민속·민족종교 등등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보살핌이 그것이다. 그 일환으로 필자는 여기에서 우리 민족사(民族史)의 등마루인 한민족(韓民族)의 고유 연호(年號)가 있는가 묻고 싶다. 주체성(主體性)이 있는가 듣고 싶다.
현대사회에 있어서 국제적으로 정치·경제·종교·사상·체육 등의 문화 전반에 걸쳐 교류가 빈번해졌음으로 세계공통의 연호(年號)를 씀이 서로가 편리하다 하겠으나, 자기만의 고유(固有)연호가 있으면서 그러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는 하늘과 땅차이라고 본다. 너무 엄살을 떤다고 혹자는 볼런지 모르겠지만 세상만사 모든 것에 「자기」라는 게 있는 것이다.
자기만이 갖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으로 해서, 서로 간에 무엇인가 교류도 하고 나누어 갖기도 하고, 주거니 받거니 자라나는(成長) 것이다. 이를테면 「자기」를 갖은 연후에라야 온갖 행위의 멋스러음이 생기고 떳떳해, 그제서야 비로소 그럴듯하게 제멋에 살 수 있는 것이어서, 갈짓자로 걸어도 동네 개가 짖지 않고 운치가 나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날의 현실을 볼짝시면, 우리는 우리자신을 너무나도 모른다는 느낌을 아니 갖을 수 없다. 일찌기 외국문물에 대한 선모사상(羨幕思想)이 야기시키는 전통(傳統)문물에 대한 경시 풍조로, 전통문화의 주체적 선택(主體的選擇)의 결여(缺如)에서 오는 거래관계는 신식민문화(新植民文化)의 이름에 다름이 아니다.
굴종의 역사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에 노예가 따로 없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와중에서 그 무슨 떳떳한 밝은 세상이 있어지겠는가. 주체적 삶이 있어지겠는가. 도대체 우리의 것을 그대로 지켜가면서 거래한다고 해서 저들이 싫어할 것은 무엇이며 안될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고유한 생활양식과 전통문화를 잘 가꾸어가는 것을 근간으로 한 거래야말로 저들에게도 이익이 되고 새로운 창조성을 불러일으키는 거래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 나라의 백년대계(百年大計)는 그 민족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사상을 여하히 잘 꾸려 나아가면서 현대화 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본다.
여기에 이르러 우리는 인간주체성 (人間主體性)의 회복과 민족의식(民族意識)의 구심점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속알 머리없이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지 말고, 눈을 똑바로 뜨고 배알이 있는 놈이 되자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우리이다. 그리고 저들은 저들이다. 그러므로 해서 우리와 저들은 서로가 동등하게, 건전하게 교류할 수 있는 것이다.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왜 우리가 저들의 시녀(待女)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왜 우리가 저들의 정치와 경제와 사상과 종교의 시녀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우리여서 우리는 우리의 것이 있다. 우리다운 우리의 삶이 있다.
한 옛적부터 우리민족의 생리(生理)라 할 수 있는 유불선(儒佛仙)운화의 전통(傳統)이 그것이다. 한민족(韓民族)의 전통사상의 맥락(脈絡)을 더듬다 보면 일관된 그 흐름의 주체가 있으니, 그것은 소위 「사람중심」의 사상이란 것이다. 사람을 근본으로 한 인간중심의 인간존중의 사상이 그것이다. 그래서 단군(檀君)의, 사람에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 정신(弘益人間精神)에서부터 유교(儒敎)의 인륜사상(人倫思想)이랄지, 천도동학(天道東學)의, “천지인(天地人)은 모두 한 이치의 기운이라, 사람은 하늘기운의 뭉침이요, 하늘은 만물의 정기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하늘이요, 하늘이 곧 사람이니, 사람밖에 하늘 없고 하늘밖에 사람 없다. (天地인 都是一理氣而已 人是天塊天是萬物之精也 人是天 天是人 人外無天 天外無人)라고 한거라든지, 저 원효(元曉)스님의 삼계가 오직 마음뿐(三界推心)이라는 인간의 마음도리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구심체의 집약처가 「사람」이라는 것이다.
물론 동서양을 막흔하고 인본주의(人本主義)니 휴머니즘이니 하며 서로들 내세우지 않은 건 아니지만 한민족(韓民族)처럼 바로, 사람이 곧 하늘이요 부처님이다. 신(神)이다라고 딱 잘라 말한 일은 없는 것으로 안다. 이는 곧 한 민족의 사상적 특성으로 저쪽 나라, 소위 서양 문화나 기독교 문명권의 신본주의(神本主義) 생각속에 도사리고 있는, 사람은 날 때부터 죄인이다(原罪), 피조물이다라고 윽박지르듯 주눅을 주는 이원론적(二元論) 논법은 발견할 수 없다. 네가 곧 하늘(한얼)이다, 부처와 물이 아니다라고 해도 믿지 않는 세상에, 이렇듯 주눅이 들어 자기의 생명의 위대함을 자각(自覺) 실현(實現)하지 않는다면, 마치 잠용물용(潛龍勿用)과 같아서 어느 하세월에 웅비등천(雄飛謄天)할 날이 있겠는가 !
그러므로 어쨌거나 이러한 사상적 흐름 속에서 그 특수성을 살펴 개선 발전시켜 나아가는 창조적 작업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주체성은 정체되고 말 것이며 어중이 떠중이의 외래 문화의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임을 알아 차려야 한다.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필자는 여기에서 우리의 고유연호(年號)를 되살릴 것을 주장하며, 이에 민족사(民族史)의 등마루에서 그 시원(始原)인 단군기원(檀君紀元)을 생각해 본다. 문헌상(文獻上)으로 들어난 단군(檀君)은 신화성(神話性)일 가능성이 많다. 실재(實在)였을 가능성도 배재 할 수 없다. 혹자는 단군의 신화성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모양이다. 실재가 아니라 개운치 않는 모양이다. 어쨌든 단군이 신화이든 아니든 간에 한민족사에 시원의 구실을 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민족사가 역사성(實在性) 속에서 그 시원이 시작되든 신화성 속에서 시작되든, 그러한 것으로 하여 민족사의 시원이 불분명해지거나 평가절하됨은 없다고 본다. 또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것이, 인간은 꿈을 ‘먹고 꿈을 꾸는 동물로서, 꿈꿀 권리를 주장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꿈꾸는 자의 몽상(夢想)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꿈이 곧 현실(現實)이고 현실이 꿈인 것처럼, 신화(神話)가 곧 실재(實在)이고 실재가 신화인 것을, 왜 신화에서 민족의 시원을 시작하지 말란 법이 있는가, 또한 실재보다 신화가 더 못하다는 법이 있는가, 가치 (價植)는 부여 (附與)일 뿐이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것이고, 아니면 아닌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시작은 있는 법이다. 어떤 형태로든 간에 단군기원(紀元)은 한민족의 연호(年號)이다. 단기는 한민족의 시조 단군왕검(王險)에서 비롯된다. 그 때가 중국의 요(堯)의 즉위 24년 무진(戊辰)년이요, 서기앞 2333년이다. 이조 말엽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大倧敎)에서 단군기원을 썼고 그전에도 고려 말엽의 학자 백문보(白文寶)둥이 그들의 문집(文集)에서 지금은 단기 몇 년이다는 말을 썼다. 대한민국의 정부가 수립되면서 정식으로 단기를 사용하였으나 5.l6혁명후 서양력인 서기(西紀)로 고쳐버렸다. 우리는 오랜 옛적부터 사대주의나 외세의 세력권에서 우리 자신을 지켜가기 위한 민족의식의 집결처로, 국조(國祖) 단군왕검(王檢)을 존숭(尊崇)의 대상과 긍지의 귀의처로 삼아왔다. 주체의식의 뿌리로 다져왔다.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서로 시대를 비교해 볼 요량으로, 아니면 국제교류상 공식적으로 서양력(西紀)-이때도 우리는 우리의 고유연호를 쓸 수 있지만, 뭐 우리의 고유연호를 쓴다고 저들이 교류를 안 한다고 나서면 그런 속알머리 좁은 녀석들과는 안노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그럴 수 없는 현실이지만-을 씀은 그런대로 이해가 간다고 하겠으나, 제나라 안에서 제나라 사람들과 서로 거래할 척에도 무분별한 처사인지 서양문화권의 연호를 거리낌없이 씀은, 마치 남의 집 제사에 가서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설치며, 자기조상 제사를 지내려 덤벙대는 꼴을 상상케 한다.
이웃나라인 일본과 대만만 보더라도 자기고유의 연호를 쓰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국제우대에서 소외 당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자기의 「얼굴」을 떳떳이 내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무엇이 모자라 우리는 우리의 「얼굴」을 떳떳이 들 수 없단 말인가. 언제부터 우리가 서양풍습대로 살았단 말인가. 여기가 저들의 나라란 말인가? 또 누가 너무 엄살을 떤다고 힐책할런지 모른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우리 사회를 올바르게 이끌어 가야 할 지도층의 인사들(정치·경제·종교·사상·체육·교육 등의 전분야에 걸쳐)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현실감각(現實感覺)과 역사의식(歷史意職)의 결여(缺如)에서 오는 민족혼(民族魂)의 상실 내지는 분열을 초래케 한다면 그 과오는 실로 엄청나다 할 것이다. 자기자신이 서 있는 자리와 상황판단이 되어 있지 않고서는 결코 어떠한 창조적 작업일지라도 바로 해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주위를 살펴야 할 눈을 감고서는 자신있게 발을 내달을 수 없는 거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눈뜬 장님인 채로 너나 없이 거리에 나셨다. 좌충우돌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혼돈(混沌)과 혼미(昏迷)와 혼탁(混濁)의 연원(淵源)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 운명권 속에서 꼴뚜기가 뛰니까 망둥이도 현다고, 의식(意講)없이 끼어들고 따라 해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범(共犯)을 저지르게 된다. 방지책은 없을까? 개선책은 없을까?
먼저 조용히 자신의 속율 가라앉힐 일이다. 그리하여 혼돈(混沌)이 가시고 혼미(昏迷)가 가시고 혼탁(混濁)이 가시면, 들여다 볼 일이다. 자신의 맑고 환(明)한 속을.
도대체, 나(我)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