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재 아내의 대학교 졸업 앨범을 놓고서 몇 장을 넘기다 말고 어이없게도 언성을 높였던 것이다.
“이 친구, 참 예쁘게 생겼다.한 번 품고 자봤으면 좋겠다.”
“뭐라구요?”
“농담이야. 나도 두어번 본 적이 있는 당신 친구 예쁘게 생겼다고 추켜주는데 왜 열내냐구.”
“……”
아내의 결심은 대쪽 같았다. 결혼 전만 해도 가끔씩 만났던 앨범 속의 연숙이라는 그녀를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아예 연락을 끊고 살았다.
선재는 밤이 되어도 그 여자를 생각했다.
―어디서 본 여자가 분명해.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생각은 멀어졌다. 카메라에 찍혔던 풍경이 광선을 받아 하얗게 변해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기억해 낼 수 없었다.
미스 윤. 그녀는 절에서 선재와 같이 봉사활동을 한 선우(善友)였다. 선재는 그녀를 사랑했었다. 그러나 소심하고 비위살이 약한 선재는 구애를 못하고 말았다. 마지막 좋은 기회마저 선재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몸이 아파서 드러누워 있는데, 미스 윤이 꽃다발을 들고서 병문안을 온 적이 있었던 것이다.
선재는 그때 분명 바보나 다름없었다. 고백을 못한 채 그녀가 간 뒤에야 눈물만 흘려댔었다.
그 미스 윤이 이곳에 나타났다니 전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선재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문득 바다를 생각했다. 선재 아내의 얼굴은 안개 속에서 뒤척이는 잔잔한 바다를 연상케 하였다. 어린 아이의 얼굴 같은 바다였다.
그 여자는 선재가 친 텐트 쪽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야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텐트들이 소나무 그늘이 있는 한 쪽으로만 몰려 있기 때문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선재는 또 다시 쪽빛 수영복을 입은 그 여자를 기다렸다. 얼마쯤 기다렸을까.햇볕이 내리퍼붓자, 이윽고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났다.
아침을 먹은 뒤, 모래밭도 다시 뜨거워지고 있을 때였다.
선재는 용기를 내어 아랫배에 힘을 넣은 뒤 그 여자를 쫓아갔다. 물 튀는 소리가 요란한 샤워장을 조금 지나서였다.
선재는 그 여자를 대담하게 불러세웠다. 그러나 그녀가 등을 돌리는 순간, 선재와 그녀는 동시에 놀랐다.
“어머 !”
여자는 치한을 만난듯 몸을 떨었다.
“제기럴.”
“누구세요?”
“절 본 적이 없습니까?”
“없는데요, 전혀.”
갑자기 할말이 없어진 선재는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혀 본 적이 없다고 하니 더 치근덕거렸다가는 따귀라도 한대 얻어맞을 것만 같았다. 선재는 진땀을 닦으며 비틀거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얘, 연숙아!”
두 사람은 만세를 부르듯 치켜든 두 손을 잡고서 껑충껑충 뛰었다.
아내의 친구한테 치근덕거린 꼴이라니… 모래구덩이 속에 얼굴을 파묻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필이면 부부싸움을 하게 한 앨범 속의 그 여자라니……선재는 주춤주춤 물러섰다. 아내가 혹시 내 남편이라고 소개할까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그렇게 뒷걸음질치다가 선재는 벌렁 나자빠지고 말았다. 모래찜질을 하고 있던 사람의 옆구리에 오른발이 걸린 것이었다. 모래를 탈탈 털면서 일어난사람의 표정은 험상 굿었다. 마치 절 입구에 서서 음흉한 사람의 망상을 깨뜨려 주는 사천왕 같았다.
그 사천왕이 선재를 향해 소리쳤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다니쇼!”
선재 아내와 그 여자는 반가움을 못이겨 아직도 두 손을 잡고 있었다.
선재는 비실비실 뒷걸음치다가 그곳을 도망쳤다. 그 사천왕이 무섭기도 하거니와 아내에게친구를 찾아주고서도 창피를 당한 것이 억울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