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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지의 사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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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여로 - 정찬주 1990년 08월 102호
먼 수명선을 넘나드는 고깃배. 은비늘을 번뜩이며 출렁거리는 바다. 왔다가는 반드시 돌아가고야 마는 파도. 모래밭을 비키니 차림으로 오가는 피서객들. 선재는 빈 텐트를 지키며 밖의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선재는 아내가 첨병거리고 있는 바다 쪽에 눈길을 주곤 하였다. 아내에게 치한이라도 달라붙는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선재는 아내에게 가 있던 눈길을 거두었다. 옆모습이었지만 몇 발짝 앞에 걸어가고 있는 여자가 낯익어 보였다. 여자의 늘씬한 몸매 때문은 아니었다. 선재의 건망증 탓일 것이었다.
선재는 여자의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하고 허둥대었다.
―어디서 만났던 여자일까?
여자는 어느새 피서객들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선재는 여자가 사라진 쪽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아내가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고 있을 때에야 시선을 지웠다.
“여보, 무얼 쳐다보고 있어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아직도 선재의 머리 속에는 그 여자의 잔영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저 아가씨들 엉덩일 쳐다보고 있는 건 아니겠죠?”
“또 시작이군.”
“또 시작이라뇨?
“내숭떨지 말라구요.”
“당신은 마치 도덕군자 같군 그래.”
“날더러 늘 별볼일 없다고 불명했으니까 여기서 실컷 눈요기하지 그래.”
“날 이상한 여자로 만들지 말라구요. 노총각 구제해 주니까 이제 와서 딴소리 하기예요?”
“하하.”
선재는 웃음을 터뜨리며 슬그머니 말머리를 돌려버렸다. 잘못했다가는 또 끝도 없는 언쟁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선재 아내는 주로 선재의 말투를 걸고 넘어졌다.
“같은 말이라도 듣기 좋게 할 수 없어요?”
“어허, 내 맘은 그게 아니었다니까. 농담도 못해 ?”

선재 아내의 대학교 졸업 앨범을 놓고서 몇 장을 넘기다 말고 어이없게도 언성을 높였던 것이다.
“이 친구, 참 예쁘게 생겼다.한 번 품고 자봤으면 좋겠다.”
“뭐라구요?”
“농담이야. 나도 두어번 본 적이 있는 당신 친구 예쁘게 생겼다고 추켜주는데 왜 열내냐구.”
“……”
아내의 결심은 대쪽 같았다. 결혼 전만 해도 가끔씩 만났던 앨범 속의 연숙이라는 그녀를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아예 연락을 끊고 살았다.


선재는 밤이 되어도 그 여자를 생각했다.
―어디서 본 여자가 분명해.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생각은 멀어졌다. 카메라에 찍혔던 풍경이 광선을 받아 하얗게 변해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기억해 낼 수 없었다.
미스 윤. 그녀는 절에서 선재와 같이 봉사활동을 한 선우(善友)였다. 선재는 그녀를 사랑했었다. 그러나 소심하고 비위살이 약한 선재는 구애를 못하고 말았다. 마지막 좋은 기회마저 선재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몸이 아파서 드러누워 있는데, 미스 윤이 꽃다발을 들고서 병문안을 온 적이 있었던 것이다.
선재는 그때 분명 바보나 다름없었다. 고백을 못한 채 그녀가 간 뒤에야 눈물만 흘려댔었다.
그 미스 윤이 이곳에 나타났다니 전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선재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문득 바다를 생각했다. 선재 아내의 얼굴은 안개 속에서 뒤척이는 잔잔한 바다를 연상케 하였다. 어린 아이의 얼굴 같은 바다였다.
그 여자는 선재가 친 텐트 쪽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야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텐트들이 소나무 그늘이 있는 한 쪽으로만 몰려 있기 때문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선재는 또 다시 쪽빛 수영복을 입은 그 여자를 기다렸다. 얼마쯤 기다렸을까.햇볕이 내리퍼붓자, 이윽고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났다.
아침을 먹은 뒤, 모래밭도 다시 뜨거워지고 있을 때였다.
선재는 용기를 내어 아랫배에 힘을 넣은 뒤 그 여자를 쫓아갔다. 물 튀는 소리가 요란한 샤워장을 조금 지나서였다.
선재는 그 여자를 대담하게 불러세웠다. 그러나 그녀가 등을 돌리는 순간, 선재와 그녀는 동시에 놀랐다.
“어머 !”
여자는 치한을 만난듯 몸을 떨었다.
“제기럴.”
“누구세요?”
“절 본 적이 없습니까?”
“없는데요, 전혀.”
갑자기 할말이 없어진 선재는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혀 본 적이 없다고 하니 더 치근덕거렸다가는 따귀라도 한대 얻어맞을 것만 같았다. 선재는 진땀을 닦으며 비틀거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얘, 연숙아!”
두 사람은 만세를 부르듯 치켜든 두 손을 잡고서 껑충껑충 뛰었다.
아내의 친구한테 치근덕거린 꼴이라니… 모래구덩이 속에 얼굴을 파묻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필이면 부부싸움을 하게 한 앨범 속의 그 여자라니……선재는 주춤주춤 물러섰다. 아내가 혹시 내 남편이라고 소개할까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그렇게 뒷걸음질치다가 선재는 벌렁 나자빠지고 말았다. 모래찜질을 하고 있던 사람의 옆구리에 오른발이 걸린 것이었다. 모래를 탈탈 털면서 일어난사람의 표정은 험상 굿었다. 마치 절 입구에 서서 음흉한 사람의 망상을 깨뜨려 주는 사천왕 같았다.
그 사천왕이 선재를 향해 소리쳤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다니쇼!”
선재 아내와 그 여자는 반가움을 못이겨 아직도 두 손을 잡고 있었다.
선재는 비실비실 뒷걸음치다가 그곳을 도망쳤다. 그 사천왕이 무섭기도 하거니와 아내에게친구를 찾아주고서도 창피를 당한 것이 억울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