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한 승보의 가람 송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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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화실의 미소 - 미산
1984년 11월 33호
대 담 ·편 집 / 향적, 시명 스님
승보종찰(僧寶宗利) 조계산(曹溪山) 송광사(松廣寺)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승도(僧徒)들에게는 마음의 고향이다.
산문에서 침계루(沈溪樓)까지 굴참나무에서 떨어져 쌓인 가랑잎을 밟으면서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유덕(遺德)을 생각하였다. 왕궁의 비호(庇護)아래 세속화를 달리던 고려불교에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새로운 정신적 지주(支柱)을 세웠던 분. 승가(僧伽)의 근본자세와 질서를 일으키기 위하여 분연히 결사문(結社文)을 짓고 명리(名利)로 부패한 승풍을 바로잡아 송광사로 하여금 안심입명(安心立命)과 구세제중(求世濟衆)의 근본도량이 되게 하여 한국불교에 사상적 반석을 놓으신 분.
송광사는 불일(佛日) 보조국사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도량이자 한국불교의 면목(面目)이다. 그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는 16국사(國師)를 배출하였고 오늘에도 그 정신의 맥을 이어 현대 한국의 고승(高僧)이신 효봉(曉峯), 구산(九山), 취봉(翠峯)스님을 비롯한 여러 선덕(禪德)들이 주석하셨으며, 외국의 여러 선승들이 찾아와서 한국의 불교를 연구하고 수선(修禪)하는 국제수도원이 이곳에 있다. 작년에 입적하신 구산스님의 뒤이어 마산(彌山)스님께서 방장스님으로 계시면서 납자(納者)를 제접 하신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계류(溪流)을 따라 오르는데 저만치 삼청교(三淸橋)가 보인다. 다리 아래 물은 옥같이 푸르고 가을 단풍잎이 간간이 떠내려오는데 그 풍경이 선경(仙景)이라 할만하다. 오후의 송광사는 조용히 가을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불사(佛事)가 한참 진행중인 대웅전에 참배하고 곧장 방장스님께서 주석하시는 삼일암으로 향하였다. 방장스님께서는 흔쾌히 우리들을 맞이하여 주셨다. 대담차 왔다고 했더니 종단에 원로스님이 많이 계시므로 그분들이 다한 뒤에 하겠다고 사양하시다가 우리의 간청에 응해 주셨다. 전통적으로 수선사(修禪社)에는 선승이 끊이지 않으므로 선(輝)에 관계되는 것을 묻고 헌대생활과 선에 관한 말씀을 중심으로 대답하여 주셨다.
수선사(修禪社)에는 지금 몇 분이나 정진하고 계십니까? 송광사는 산철결제를 안하셨습니까?
올해는 대웅전 불사도 있고 해서 산철결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몇몇은 그냥 선원에서 자유롭게 정진하고 있지요.
한국불교의 맥이 선(禪)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어 왔는데요. 그 가운데에서도 화두선(話頭輝) 즉 간화선(看話輝)이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수선(修禪)할 분들에게도 화두가 중요하다고 보십니까?
저는 전통적인 화두선 즉 간화선을 해왔고 또 앞으로도 응당히 전통적인 방법을 그대로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화두 그 자체는 선을 하는 한 방법이 아니고 화두를 통해서 깨닫음을 얻는 것이 목적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요즈음 세상에서는 명상법이나 단전호홉이 곧 참선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 생각은 잘못된 견해이지요. 명상과 호흡법은 참선을 하기 위한 준비 단계이거나 방법이지요. 보편적으로 호흡과 자세는 참선하는데 있어서 퍽 중요하지요. 그렇지만 그 자체가 참선은 아닌 것이지요.
흔히들 선은 조사선(租師輝)이니 여래선(如來輝)이니 하는 말로서 우리 재래 선원에서 퍽 많은 논란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면 요즈음 세간에서 말하는 명상과 우리 선가에서 이야기하는 참선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조사선은 중국적(中國的)인 선 오히려 종(宗)으로써의 선(禪)이라고 보고 있으며 여래선이란 인도의 명상법에서 한 단계 발전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단순한 명상을 흔히 요가라고 하는데 거기서 더욱 발전된 것이 관법(觀法)이고 그것울 더욱 더 전문화하고 중국인의 사유(思推)에 맞게 한것이 중국적인 화두선(話頭禪)이지요. 그러나 참선은 행.주.좌.와(行.住.座.鳳)와 어.묵.동.정 (語.熱.動.靜)에도 화두를 들어야만 참선이지요. 그리고 단순히 마음과 육체가 고요히 쉬는 것만을 명상법에서는 강조하지만 참선에서는 견성(見性)을 강조하고 있으며 종교적인 발원이 있어야 하지요. 광도중생(廣度聚生)하려는 발원이 함께하지 않으면 사실은 참선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자연 불조혜명(佛租慧命)을 잇는다는 것은 참생명의 본질을 깨달음으로서 중생과 하나된 자비를 성취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명상이 되고 말지요. 요즘 수좌(首座)들을 보면 참 발원이 부족한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보살행과 참선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봐요. 또 그것은 한 방향이어야 합니다. 곧 바라밀(被羅蜜)의 실천과 참선은 한 길이지요. 참된 발원에서만 참선은 있을 수 있고 견성하거나 오도(惜道)한다면 마땅히 발원한 바를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외국인들에게는 화두를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요?
우리가 하는 대로하지요. 중국계 스님들은 대개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것 같아요. 그밖에 구미 (歐美)에서 온 사람들은 「이뭤고」 같은 화두를 하지요.
그들의 자세는 퍽이나 진지해요. 보통 이곳에 와서 3년에서 9년까지 정진하는데 한 절에서 그렇게 오래도록 공부하는 한국 스님도 드물지 않아요? 뭔가 내적(內的)으로 공부가 되는 것 같이 봐지요. 적어도 마음에 헐떡거림은 쉬는 것 같아요. 어떤 때 보면 퍽 우직하고 진실해서 오히려 가르치는 쪽에서 감동을 받지요.
요즘 사람들은 근기(根農)가 하열해서인지 참선을 너무 어렵게 받아 들이고 있고 또 당장에 무슨 효과를 얻으려는 마음으로 접할려고 하는데 참선이 사회적으로 어떤 이익을 준다고 스님께서는 생각 하십니까?
그렇기도 하군요. 참선이란 본래 구하는 바가 없는 공부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얻는 이익이 있어야 하지요. 그러나 당장 효과를 얻을 수는 없지요. 그것은 오랫동안 망상분별에 휘둘린 생활 습관을 바꾸기가 힘들기 때문이지요. 또 자신의 본래연목(本來面目) 즉 참생명을 아는 일은 그렇게 쉽게 되지를 않아요. 쉽게 성취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오히려 부족한 사람이지요. 크게 버리는 자라야 크게 얻을 수 있지요.
지금은 참선도 중요하지만 포교도 퍽 중요한데. 포교와 참선의 관계는 어떻게 보십니까?
오늘날 이 시대에는 포교와 참선. 도제양성등 모두 다 중요한 시대입니다. 참선은 그 모든 것의 바탕이지요. 포교하는 이들도 적어도 몇 철은 선원에서 수행해야 하고 선원에 계시는 스님네도 포교하는 것을 비방해서는 못쓰지요. 서로서로 보완의 관계에 서서 참선하는 스님네는 포교하고 행정하는 이들을 보면 내가 공부하고 대신 포교하고 행정해 준다고 감사해야 하고 수화라 해서 공부도 계행도 제대로 안 지키고 야만심(我曼心)만 높다면 그것도 문제고 참선하는 이들을 앉아서 그냥 양식만 축낸다고 보고 있는 행정승이나 포교승이 있다면 그것 또한 문제입니다.
오히려 포교하는 스님들은 열심히 수행하는 스님들을 보면 더욱 열심히 하여 크게 깨우쳐 제도해줄 것을 바라며 서로가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하리라고 봅니다. 그런 풍토 속에서만 서로의 화합도 있고 발전도 있게 되리라고 봅니다.
송광사는 매년 여름에 일반인을 위한 수련대회가 열리고 있는데 퍽 좋은 반응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또 새로운 수련장 마련도 한다고 들었습니다만….
어디든 수도원과 포교원이 함께 공존해야지요. 수도와 포교는 하나로 연결되어야만 합니다. 법정 (法頂)스님의 원력이 크고 주지스님 및 대중의 생각들이 장하십니다. 정말 정혜가 쌍수(定慧雙修)되어야지요. 수련원은 한창 준비중에 있습니다.
오랫 만에 만난 반가운 정인(情人)과 대화하는 듯 스님께서는 전혀 격의(格意)없이 퍽 자상하게 여러가지 말씀을 많이 해 주셨다. 역시 송광사는 면면히 이어온 전통의 맥이 오늘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음을 우리는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우화각 아래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석양이 내리는 16국사의 장엄한 비(陣) 위에 가을 잎새들이 조용히 떨어져 쌓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