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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띄우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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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 홍교 1984년 10월 32호
귀의삼보
스님
강산이 변한다는 햇수만에 찾은 가람은 제행무상을 여지없이 보였습니다. 시간은 언제나 그대로이니 세월이 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간 것이고, 바꿔 말하자면 무대 위에 광대가 선 채 달음질 시늉만 내고 전봇대 가로수 자동차 집들을 스치게 하는 효과처럼 유상한 우리의 변화지요.
시계바늘 일초를 미분한 찰라의 단위에도 세상은 가만있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자그마치 십년이니 안 변했다면 부처님 말씀이 틀리게 되지요. 그것을 계량하지 못하고 옛날 생각대로 하늘 쪽을 쳐다보며 밤길을 올라가면 되려니 했지만, 신부락인지 구부락인지 호객꾼도 없는 초저녁 뱃속에 방향감각을 완전히 마비 당했고, 빛만 없으면 무용지물인 눈은 왜 양쪽에 나란히 두개나 있는지 허망했습니다. 아니 전깃불 밑에서도 끝내 하수도에 빠져 그 향내 짙은 물에 관욕을 잘 해서 육신도 옷도 말끔히 하고 말았으니 어이없을 뿐이지요.
유명한 등반가가 손발을 잃고도 부단히 오르기에 왜 그러냐고 묻자 산이 있기 때문이란 명언을 전하고 있지요. 낮밤없이 매일 서울에서 아귀다툼하다가 벼르고 별러 산길에 올라 밤을 새울려니 개울물 소리가 빗소리처럼 들려 안절부절이었습니다. 마치 달나라에라도 도착한 기분으로 사바쪽인 지구를 관조하려던 꿈을 청각마저 기계 속의 인간들 구업 짓는 소리에 닳고닳아 자연의 화음을 듣지 못하게 했군요. 그 알량한 문명은 편하려고 잔꾀를 짜낼 때마다 가공할 독소를 내뿜고 있지요. 그래서 귀도 단단히 감염됐다는 증거입니다. 거짓말을 보탠다면 조용한 정적이 불안하고 고요의 소리가 들린다고 소리 칠 일입니다.
한 나라의 인구가 네사람 중 한 명이 한 도시에 몰렸다는 현실부터가 불가사의이고, 그 많은 입들이 음식물을 삼켜야 하고 더우면 벗고 추우면 껴입거나 있는 곳을 덥히고 호들갑을 떨어야 콧구멍으로 탁한 공기를 넣고 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그 인간이 모자랄수록 사는 방식이 현깃증 나게 현시돼야 큰 위안을 받는다지요. 너나 없이 왜 이다지 우습게 됐는지 알것 같으면서 잘은 모르니 더더욱 답답합니다. 누가 어떠하니 난들 못하랴는 추세에, 누가 죽었다면 나도 그러자는 일만 제대로 돼도, 세상은 단순하고 퍽 살기 쉽지 않을까요. 물론 죽기도 쉽고요.
지족암 큰스님의 유 앤드 아이 해브 커넥션(You And I Have Connection)이란 법문일화는 신식 조사 공안으로 채택해야겠습니다. 너하고 나하고 인연이 있다는 뜻이지만 상대방이 진 해크만(J.HACKMAN)의 프렌취 커넥션(FRgNCH CONNECTION)을 연상했더라면 아찔할 일이 됐겠으나, 우리가 모두 인연 아닌 커넥션으로 얽혀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방장스님께서도 이것과 저것의 함수를 말씀하셨지만, 우리의 생과 사도 바로 그 도리이건만 흔히들 생쪽만 자기 것이고 사쪽은 자기하고 무관하려고 하니 한심합니다.
스님의 전별을 받고 대구에서 고속도로에 진입해서 반시간도 달리지 많아 소형 화물차가 모로 누워 길을 막고 지독한 냄새의 화학물질이 불길을 올리고 있는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또 대전을 지나서는 대형화물차가 길 밑으로 자빠진 모습을 스쳤고 라디오 뉴스는 하늘에서도 전선에 걸린 날틀이 인명을 앗았다고 전했습니다.
과연 생과 사가 별개의 것일까요. 우문이라면 현답은 무엇일까요. 하루 살았다는 것이 하루 죽었다는 뜻인데, 모두 사는 쪽만 매달리지요. 죽음은 꼭 죽어봐야 안다면 더 할 말은 없고 그런 논리로 살아보니 삶을 알수 있나요.
자꾸 말꼬리를 물고늘어지자면 어제 산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고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일수 없으니 계속 살아봐야 결론이 난다 일까요? 건방진 말씀으로 살아 볼수록 점점 더 알 수 없는 것이 정확한 대답입니다.
차가 뒤집혔는데 길이 막히고 목적지 도착이 늦겠다고 투덜댔지, 사람에 대해서는 근심하는 상식이 없었고, 비행기가 물에 추락했다니 헤엄치기에 좀 쌀쌀하겠다는 조롱이더군요. 참극이 다반사니 인심도 고갈돼서 일일이 신경 쓰지 못하나요. 물론 방심하지 않는 삶이 가장 성실한 삶이요, 순간 순간을 생사로 엮는 지름길이고, 죽음도 두렵지 않는 묘수인줄 누가 모릅니까. 어떻게 살았냐는 어떻게 죽었냐와 같습니다.
그런데 부질없이 산에 갔다가 돌아와서 다시 구업과 신업과 의업을 쌓고 있으니, 천방지축 서울 독을 세척하겠다고 설치고서는 산에 사는 사부대중을 어지럽혔으니 이 무슨 짓이지요. 손의 안팎 같은 삶과 죽음이요. 남섬부주 가야산과 서울인데 공연히 바람 잡고 왔습니다.
범에 물려 가도 정신 차리랬다고 서울에서 휘말려 돌아가도 저 끝에서 어렴풋이 다가오는 종점은 스님도 지향하는 공동목표입니다. 계속 스님의 정진을 배우고져 하며 지족암 큰스님께도 안부 전하여 주십시요.
홍교 계수례 (權首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