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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輪廻)와 해탈(解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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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보현 1984년 10월 32호
윤회(輪廻)와 해탈(解脫)은 불교의 교리 체계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윤회는 바람직하지 않는 삶의 세계요, 해탈은 바람직한 삶의 세계라고 한다면, 윤회와 해탈은 어떤 의미에서 상대되는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상대적인 관계에 있는 윤회와 해탈의 이해에 있어서 윤회와 해탈을 부정하던가 아니면 이원적으로 분리하여 인식하려는 경향이 있다.
윤회(輪廻:Samsara)란 원래 어떤 것에 얽혀 처음과 끝이 없이 반복하여 도는 속박의 고달픈 삶(Sabha: 고된 곳) 이다. 반복적이고 지리하고 무의미한 세계이므로 모든 것이 고달픔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 삶의 세계는 분명히 즐거움보다 괴로움이 훨씬 많다. 천차만별의 짧고 짙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결국「인생(삶)은 고달프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생이 고(苦)라면 삼계(三界)에 윤회하는 고통스런 삶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 곧 종교적 수행은 의지적인 창조의 행위로 진행하도록 하는 미묘한 삶의 받침대가 된다. 그리하여 불교는 이 명제의 철저한 체험에서부터 출발하였던 것이다.
해탈의 의미는 그러한 얽혀 묶임에서 자유로이 풀려나 걸림이 없는 것(Vimoksa:자유)을 말하므로 즐겁고 자유스런 영원의 삶이 된다. 해탈은 영원한 환희와 창조적인 행위의 세계인만큼 그곳은 분명히 사람이면 마땅히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삶이요 불교의 목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불교는 윤회의 고달픈 세계에서 해탈의 즐거움에로 나아가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꼭 주의하여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윤회와 해탈이라는 서로 상반된 세계가 우리 인간세계에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인식문제이다. 즉 윤회의 세계는 ‘여기’이고 해탈의 세계는 ‘저기’라고 분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그렇게 나뉘어진 삶의 세계가 있다면 우리가 해결하여야 할 문제는 간단하고 쉽게 풀려질 것이다. 왜냐하면 객관적으로 뚜렷한 삶의 형태가 주어짐으로써 우리의 육감(肉感)으로 확인되어 그대로 되어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란 객관적인 기준에 의하여 ‘여기는 괴로움의 세계’ ‘저기는 즐거움의 세계’라고 할만한 아무런 기준이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말하자면 현실적 인간의 삶은 선과 악, 더러움과 깨끗함, 괴로움과 즐거움 등이 뒤섞여 있는 포괄적이고 함수적인 가능태로서 인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사랑하기도 하는가 하면 증오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현실적인 삶이다. 따라서 그것은 완전히 희고 검다는 식의 흑백 논리적인 삶의 세계가 아니라 모두가 변수 많은 연기 관계 속에서 동시에 있게 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에서 구체적인 ‘나’가 윤회의 세계와 해탈의 세계를 동시에 살고 있는 것이, 마치 창경원의 원숭이가 장난과 재주를 부리는 것과 흡사하다. 웃고 즐거워함은 그것이 해탈 즉 자유의 세계요, 괴롭고 증오하는 그것은 윤회 즉 속박의 세계이다.
자유와 평화 그리고 평등을 이룩하느냐, 아니면 부자유 불안차별을 낳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의지적 선택에 달려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윤회와 해탈의 세계이지만 그 어느 것을 선택하여 창조하느냐는 것은 그 인간 스스로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불교는 윤회와 해탈의 세계를 설정하고 바람직하지 않는 윤회에서 바람직한 해탈의 삶으로 나아가 영위하도록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세계가 따로 독립되어 객관적으로 구별되어 있지 않으므로서 우리는 마음을 깨닫는 내적 체험으로서 그 이상을 성취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계속적인 자기부정의 변증법적인 창조(無我의 實?)만이 가능하게 한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극복해야 할 모순이 내재하여 있으므로 그 모순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하는 창조적 의지가 해탈에 들게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윤회와 해탈의 세계는 자작자수(自作自受한다는 것이 불교의 대전제라고 할 수 있다.

(동대 불교대학 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