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고 싶은 길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수상 - 여연
1984년 09월 31호
-그것들의 흔들림은 우주의 고통이다-
비가 내린 후의 사원 숲은 참으로 해맑다. 싸리꽃 망우리로 열리는 잎새 위의 물방울이 유백색 백자빛으로 풀리고 있다. 안개 속으로 젖어오는 옥잠화 꽃향기가 현당 뜨락에 가득하다.
남산 청량사 뒤꼍에 노송의 휘어진 가지 사이로 소복한 구름 떼들을 쓸고 성큼 가을이 스며온다. 서둘러 가을을 불러모으는 바람 소리에 병든 잎새가 진다.
제 목숨을 다 부지 못한 채 제 가지 끝을 떠난 잎새들이 듬성듬성 산길에 누워있다. 잎새를 만지면 그 얼룩진 잎새에는 미진한 숨결이 남아있다. 아직 다 떠나지 못한 여린 숨결 속에는 옳게 살지 못한 내 생의 서성임, 그 회한이 엉켜 서리어 있다.
아직은 성숙히 열리지 않는 가을 머리에서 저만큼 펼쳐져 굽어드는 산모롱이를 가늠하면 마치 우리들 생이 가야 할 아득한 길이 비스듬히 누운 듯 하다.
문득 휘어진 길을 따라 나서면 풀려지지 않은 실존의 어둠이 배꽃처럼 환하게 열릴 것만 같다.
나무끝에서 바람이 수런수런 길을 떠나고 있다. 떠난 바람은 흔적을 남기지 않으므로 하여 청정하고 자유롭다.
갈참나무 숲 속에서 침묵의 그물을 짜던 산새 떼들도 푸르륵 공기처럼 가볍게 길을 떠나고 있다. 그러한 새떼들의 비상을 보고 있으면 알 수 없는 슬픔의 뿌리가 돋는다.
여린 나무뿌리에 서린 물방울이 그 시원을 떠나고, 바람이 불고, 침묵하던 산새가 그 둥우리를 떠나는 것은 나를 슬픔에 젖게한다. 그것들은 모두 흔적을 남기지 않는 그대로의 自由이기 때문이리라. 떠나가 돌아오지 않는 완전한 떠남, 그것이 연소하는 생명은 싱싱한 자유의 내음으로 충만되어 있다. 그들이 떠나가 머물음없이 自由(자유)롭듯이 내 영혼이 순례하는 새벽의 길도 이렇게 남김없는 바람이고 싶다.
순한 바람이 되어서 망고나무 숲 아래서 우는 불타의 눈물로 만나고 싶다.
어느 날 비 갠 템풀꽃 향기 내리는 망고 숲속에서 아란과 산책하고 계시던 세존께서 문득 멈추어서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계셨다. 아란은 깜짝 놀라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지극히 높으신, 그리하여 출세간 모든 것에서 떠나신 세존께서 어찌하여 우시옵니까? 아직도 무슨 슬픔이 남았습니까? 제 가슴은 어두워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말씀하여 주십시요” 하니 이윽고 고요를 풀고 “아란아 듣거라. 너는 저기 숲속 키드나무 잎새에 어리는 한 물방울이 떨고 있음이 보이지 않느냐? 나는 저러히 작은 풀잎, 하찮은 나무잎 하나에 어리어 무심히 떨리는 한 방울의 물빛 속에서 전 우주의 떨림, 그 진한 고통을 느낀다. 아란아 작은 풀잎 하나에서 개화되는 생명의 씨. 그것들의 흔들림은 우주의 고통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세존은 산 그리메에 고개를 돌리시었다.
세존의 저 깊은 심연 속에서 피어나는 울음, 모든 사물에 고여 있는 존재의 넋에 동참하여 우는 그것은 생명에 대한 가장 절실한 연민일 것이다. 이렇게 싱싱하게 無(무)자체로 울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나와 사물과 그것들이 이루는 세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쪽빛 도라지꽃 지는 이 가을 걸림 없는 흐름, 침묵하는 새들의 자유스런 비상으로 먼 길을 떠나 세존의 눈물을 만나고 싶다.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의 고통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순한 바람의 비상을 꿈꾸리라. 낡고 겉치레한 관념의 의상을 벗고 자유, 그 순수한 無(무)가 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