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틈을 내어서 산행을 하게 됐을 때, 그 산에 절이 있음을 알고, 은근한 경이로움을 느낀다. 산간의 물가에 서 있는 절은 노변에 핀 질경이 꽃이나 민들레꽃처럼 아름답다. 내가 말하는 〈절〉이란 일반적인 사찰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런 것만이 아님은 물론이다. 「삼국유사」에 보면 사복(抱福)이란 이가 풀뿌리롤 뽑고, 그 아래로 열리는 절(華藏世界)로 들어가 버리는 얘기가 나온다. 이 얘기 속의 〈절〉은 존재의 돌아갈 곳, 즉 근본으로의 회귀처를 상징한 것 같다. 절은 가람 또는 정사(精舍) 라고도 한다.
불상을 모시고 승려들이 거주하면서 불도를 닦고 교법을 연설하는 집이라는 사전식 풀이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넓게 잡아 이른바 「처처물물이 법당 아닌 것이 없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삼라만상은 모두 절이랄 수가 있다. 최근 읽은 어떤 소설 속에 「영혼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떠올린 대목이 있었다. 확실히 기억은 안나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 해 답을 이렇게 내렸다. 「산과 들, 바다가 바로 영혼이 아닐까?」 이 소설이 말하는 〈영혼〉이란 무엇일까. 이 소설의 해답대로라면 산과 들, 바다가 바로 영혼이라기 보다는 「내」가 그것들을 〈보고〉 영혼을 〈느끼는〉것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영혼〉은 바로 〈내가 보는 것〉에서 비롯된 어떤 존재성의 인식이다. 종교는 이를 확대하여 〈우리가 보는 것〉으로서의 보편적인 존재성의 인식일 수 있다. 그렇다면 종교가 추구하는 존재의 겉으로 드러난 모습, 또는 그 세계로 들어서는 관문으로서의 세계가 곧 사원이며 절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존재가 불성 불성은 어떤 의미로 영혼의 진수를 일컫는 것인지도 모른다 을 갖는다는 것은 곧 삼라만상이 바로 절이라는 얘기같이 들린다. 그 〈절〉은 지혜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의 그 〈눈〉에 의해서 세워진다. 「화엄경」이나 「열반경」이 그리는 찬란한 불국토는 바로 절이 된 삼라만상의 표현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하찮은 띠풀 속에서도 절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이 때문에 사실이 된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기독교가 표방하는 사랑, 불교가 드러내 보이는 자비는 그러한 삼라만상이 가진 교회나 절의 빛과 자기와의 혼연일체 상태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법화경」에 있는 다음과 같은 귀절이 떠오른다. 「그때 세존의 눈썹사이 백호(白毫)로부터 일조(一條)의 광명이 비치었다. 그 빛은 동쪽을 향하여 l만 8천의 많은 국토에 흘러서 이들 모든 부처의 국토가 아래로는 대지옥으로부터 위로는 우주의 정상에 이르기까지 그 광휘에 의해 완전하게 보여졌다.」 여기에 보이는 빛은 자비 그 자체이다. 그 빛은 삼라만상이 바로 절이 되게 한다. 그러므로 그 빛은 큰빛 즉 대광명이라 부를 만큼 위대하다. 자비의 빛은 대상을 향한 일방적인 〈비춤〉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상을 비춤과 동시에 대상과 빛, 그리고 대상을 향하는 주체자가 혼연일체로 변하게 한다.
그 빛은 그림자를 만들지 않는 빛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물리적인 빛이 아니다. 물리적인 빛은 대상의 반대편에 그늘을 남긴다. 어디까지나 대상의 곁에 비쳐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화경」에 보이는 빛은 대상의 거죽에 비치는 것이 아니라 대상 속을 온전히 스며든다. 그리하여 대상과 빛은 한데 버무려져서 대상이 빛이 되어 전후좌우 모든 쪽으로 빛을 낸다. 그러니 그림자가 생길 까닭이 없다. 이러한 대광명의 자비사상은 「삼라만상에 불성이 없는 것이 없다」는 인식과 통하여, 동시에 「금강경」의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와 닿는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해인사만이 절이 아니라, 나무도 띠풀도 절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람 역시 절이 된다. 「처처물물이 다 법당」이라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이름일 것이다. 그 절들은 제각기 불국토의 빛과 색채로 장엄되어 있다. 해인사는 가야산과 주위의 고을, 더욱 넓게는 그것들을 둘러싼 세계에 의해 장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존재의 장엄은 이처럼 그 존재의 세계성과 역사성, 그리고 현실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내가 모처럼 가야산 산행을 하는 것은 나를 장엄한 가야산 속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동시에 가야산은 나에 의해 새롭게 장엄된다. 이 상호관계의 아름다움은 경이롭다. 이런 아름다운 관계 앞에서 누가 추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 여름은 많은 사람들이 산과 절을 찾는 계절이다. 찾아가는 관광객들은 물론 이들을 맞는 스님들은 이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를 아름답게 장엄하려는 의식이 필요하다. 자연보호니 뭐니하는 말들이 하도 많아서 괜히 해본 소리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