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강원)
연기는 불교의 진리를 표현하는 가장 기본적인 교리이다. 아함(阿含)에 있어 「연기」는 인생의 고뇌가 생기(生起)하는 원인을 밝히는데, 그 중점을 두고있다.
무엇으로 죽음이 있는가, 생이 있는 까닭이다. 무엇 때문에 생이 있는가… 하고 추구한 결과로 고뇌의 근본 원인이 무명 (無明)에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널리 알려진 l2인연설(十二因緣說)은 이 사실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12인연설에서 말하는 연기의 갚은 뜻은 인과 연의 차제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에 의존하여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있는 까닭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는 까닭에 저것이 멸한다.」고 하신 말씀은 연기의 참 뜻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인이나 연이 결정적으로 존재해 있어서 거기에서 어떤 사물이 생겨난다는 뜻이 아니고, 사물 그 자체에는 독립된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유신론(有神論)적인 창조설(創造說)이나 유물론(有物論)적인 적취설(積聚說)등의 모든 실재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색심 (色:물질적 존재, 心 : 정신적 존재)의 모든 존재가 인과 연의 가합(假合)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참된 실체가 없다는 의미에서 연기(緣起), 무자성 (無自性), 공(空)이라고 하는 것이다.
용수(龍樹) 보살은 생기론(生起論)에서 「연기는 공이다」라고 존재의 실상을 밝히고, 만물은 불변의 자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연기로서 성립되기 때문에 공이라는 것이다. 만일 흙에 흙이라는 불변의 성질이 있다면, 결코 흙에서 찻잔을 만들어 낼 수 없다.
흙의 불성이 공한 것인 까닭에 그것은 찻잔도 되고 꽃병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물이 실재한다고 하는 생각은 바꾸어 말하면 내가 존재한다는 관념이 되고 마침내 「나의 것」이라는 집착이 된다. 이것은 인생의 온갖 고뇌하는 근원이 되는 것이다. 집착은 곧 소유한다는 것으로 소유는 그 대상에 의지하고 안주하는 것이다. 여기서 소유한다는 것은 주체가 대상인 객체에 소유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소유는 독립과 자유를 상실하게 할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불안정을 낳게 된다.
연기는 곧 공이지만, 또한 연기는 변화라고 할 수있다. 존재는 연기에서 그 상을 나타내기에 존재 역시 변화의 과정인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상주하는 독립된 실체가 없다하여 무상(無常)이라고 했다. 일체 만물은 연기에서 생겨난 까닭에 무상한 것이며, 무상은 곧 변화의 과정으로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다.
자기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심어주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선하고 청정한 마음에서 이탈되어, 오염된 마음에 떨어져 있다고 본다.
현실의 우리는 존재적으로나 인식적으로나 본래의 자아에서 소외된 존재이다.
이렇듯 부처님은 연기의 참 뜻을 깨달아 공을 체달하는 것만이 불생불멸하는 생명의 도에 나아가는 것이며, 진정한 자아의 회복임을 선언하고 있다.
중아함(中阿含)경의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고 하신 말씀은 영원한 생성의 과정에 있는 우리들 모습이며, 무한한 흐름(空)으로 살아 움직이는 창조의 원동력인 것이다.
이 살아있는 존재 그 자체의 실체성을 다시 부정(諸法無我)함으로써 삶의 무한한 공간(空)을 깨우쳐 주시어 해탈(解脫)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존재(存在), 괴로움(苦), 연기(緣起), 공(空), 열반(涅槃)의 모두가 자성이 없는 중도상(中道相)임을 설파하였다. 이것은 고난속에서 상락아정(常樂我淨)을 누리며, 죽음속에서 불멸의 생명을 살 수 있는무한한 삶의 용기를 제시한다. 우리는 현상계의 생멸하는 법에 집착하지 않으므로서 유무(有無), 생멸(生滅)을 벗어나, 중도실상(中道寶相)을 깨달아 그 법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보이신 그 생명의 도는 보편적인 인간 구원의 진리이으로 세상에 끝없는 사랑으로 중생에게 조건없는 베품의 삶을 강조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