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정토신앙의 구조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논단 - 제월 1984년 07월 29호
정토신앙의 기본구조는 이상세계로서의 정토와 구세자로서의 인격심과 정토를 염원(念願)하는 인간에 의해서 짜여진 하나의 구조물이다.
이러한 구조물이 가지는 기본적인 성격중의 하나는 유토피아 (Utopia)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현실에서 부딪쳐오는 문제에 대해서 지금 여기에서 해결할려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런 현실에서 벗어나 다른 어떤 차원의 공간이나 시간으로 인간을 도피시키려는 것이다.
현실이 처해진 장소가 아니라, 여기가 아닌 어떤 공간으로 인간을 도피시키려는 시도가 아미타불(阿彌防佛)의 서방정토라면, 시간상의 어느 다른 세계로 인간을 유도하는 것이 메시아로서 미륵불(彌勒佛)의 용화세계(龍華世界)에 대한 신앙이다.
유토피아에의 꿈은 인간에게 신화를 제공한다. 신화는 인간에게 꿈과 희망을 그리고 삶의 지표(技標)를 주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결국 인간을 신화의 늪으로 몰아간다. 신화적인 사고는 인간에게 많은 것을 가리켜 주지만,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현실의 문제는 신화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윤리적 행위에 의해서 해결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토신앙에서 추구하는 서방정토나 용화세계는 불교에서 추구하는 이상적인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가 추구하는 이상은 열반(涅槃)의 세계다. 아미타불의 서방정토나 미륵불의 용화세계는 열반보다는 극락 (極樂)이나 천국(天國)의 개념에 가까운, 감정적으로 만족한 그리고 편안한 욕계(慾界)나 색계(色界)의 세계이다. 욕계나 색계는 기도나 행(선행)에 의해서 도달될 수 있지만, 윤회(輪廻)를 벗어난 열반의 세계는 아닌 것이다. 욕계나 색계는 윤회의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는 기도나 선행에 의해서 태어난다 하더라도 닦은 업(業)이 다하면 다시 악취(惡趣)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윤회하는 세계인 것이다.
또 아미타불이나 미륵불이 가지는 인격신적인 요소이다. 신앙의 대상이 가지는 인격적인 성격은 타력(他力)에 의한 구제의 신앙형태를 가지게 된다.
불교는 인격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적 종교이고, 타력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자력(自力)에 의한 깨달음의 종교다. 대승불교에서는 인격성을 가지고 신격화된 보살이나 부처님의 개념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은 무신론적이다.
정토신앙의 타력에 의해 신앙형태가 가지는 인격신적인 성격의 문제. 계시나 은총의 내용이 가지는 선악(善惡)의 문제, 계시받은 자로서의 예언자의 진위(質僞)의 문제등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타력신앙은 인격신적인 대상에 안주함으로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불안이나 회의(懷疑)로부터 쉽게 도피할 수 있으나, 권위를 가진 대상 자체가 낳는 병폐는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권위에 대한 복종은 인간이 자유로운 자아를 가진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하는 댓가를 치뤄야 하는 것이다.
계시나 은총을 주는자로서 신이 천사인지 악마인지, 천사가 악마의 탈을 쓰고 나타났는지, 악마가 천사의 얼굴을 가지고 나타났는지 계시받는 자로서는 알 수도 없고,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계시를 받은 자가 생각해서 인간에게 보호적인 것은 천사이고, 파괴적인 것은 악마라고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받은 내용의 선악도 알 수 없고, 인간을 구제할 계시받은 예언자가 진짜 예언자인지 가짜 예언자인지, 예언자 자신도 모를뿐만 아니라, 타인은 더욱 더 알 수 없는 것이다.
끝으로 정토신앙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병폐는 정토의 건설을 위해서 취하게 되는 현세적 방법이다.
정토신앙이 사회적 문제로 제기되는 데에는 몇가지 원인이 있다.
일반적으로 기존의 사회질서가 동요하여 혼란된 사회적인 상황에서, 인간이 현실의 고통과 삶의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수단으로던가, 아니면 기존의 사회질서를 변혁하기 위한 이상적인 세계에 대한 민중의 원망(願望)이 서린 혁명사상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의 사회적 기능, 즉 역기능적(速機能的)인 요구가 강하게 작용할 때 천년왕국설적(千年王國說的)인 민중의 정토운동이나 구세자로서 메시아적인 미륵불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현재 민중불교를 지향하고, 불교의 사회참여나 역사의식을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요구에 대한 반응이라고 생각된다. 불교가 비사회적 (윤리), 비역사적이라는 비난은 사회과학적인 측면에서 보는 판단에 불과하다. 불교(종교)의 사회적 관계나 역사성은 사회과학적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종교의 사회참여가 사회사업적인 참여나 정치적인 참여라면, 예수가 유대 민족을 위하여 지상의 왕국을 건설해야 옳았고, 석가가 조국 카필라를 위하여 칼을 들었어야 하고, 국민을 위하여 왕이 되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 살아남은 것은 왕으로서 석가나 예수가 아니라, 제국건설자로서 왕의 자리를 포기한 댓가로, 구세자로서 역사에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나 석가의 행위가 비사회적이고 반역사적이라면 할말은 없지만, 그러나 종교인의 사회적 관여나 역사성은 이러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히피 (Hippie)식의 행동양식을 예로 든다면, 히피식의 행동양식은 반사회적이라 비난받고, 구체적으로 역사적 사건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자연보호나 핵무기 반대등의 새로운 문화적 시각을 우리들에게 주고, 역사의 방향을 바뀌게 할지도 모른다.
정토의 건설을 위하여 취하게 되는 현세적 방법은 정치적 이데올로기(Ideology)와 결탁하여 폭력적인 힘을 행사하게 되고, 유토피아 자체가 가지는 전체주의적인 성격은 독제체제나 폐쇠된 사회를 낳을 뿐이다.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잠시 아니면, 부득이하여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폭력이라는 수단은 결국 스스로를 망하게 하는 것이다.
칼을 가진자는 칼로써 망한다는 말과 같이, 폭력으로써 이 사회를 구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미망(述忘)에 불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