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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율을 생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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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화실의 미소 - 자운 1984년 07월 29호
해인사에서 홍제암으로 가는 길목에는 잡목 숲이 6月의 햇살을 받아 더욱 그윽한 벽수해(碧樹海)를 이루고 있었다. 잡목 사이로 언뜻 언뜻 보이는 잣나무들, 다람쥐들은 인기척에 놀라 바위 틈을 따라 저만큼 달아난다. 오늘따라 상봉은 흰 구름에 덮혀 더욱 신비하고 한층 멀어보인다.
새로이 단장된 사명대사(四溟大師)의 비석 거리를 따라 가노라면 사명대사가 만년(曉年)을 보내고 입적 (入寂)한 그래서 그의 시호를 따라 홍제암이라고 이름한 암자에 도착하게 된다. 사명대사는 여러 곳에 주석 하셨지만 만년에는 가야산에 은거하였고 바로 이곳에서 입적하신 만큼 홍제암은 예사 절이 아니고 역사의 향기가 서려있는 곳이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일제 (日帝)시대에는 이곳에 있는 사명대사의 공적비를 일본인 형사가 민족혼을 없애느라고 파괴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 형사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속설(洛說)과 함께 깨어진 빗돌을 맞추어 다시 복원하였다는 흔적이 있는 비 앞에서 잠시 숙연하여진다.
역사는 늘 그렇게 흘러가지만 그 역사의 이변에 새겨진 정신은 우리들을 한 순간이나마 역사의 현장 속으로 끌어들여 다시 우리를 역사적 교훈에 젖게한다. 그러므로 역사와 역사의 현장은 참으로 중요하다. 각설하고.
오랫만에 서울에서 한국 현대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율사의 한 분이시고 살아있는 계율의 스승이신 자운스님께서 홍제암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자운스님을 뵙고자 홍제암으로 향하였다.
흔히 율사라고 하면 굉장히 엄격하시고 마른 나무처럼 딱딱한 분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스님은 언제 뵈워도 자상하시고 인간적으로 따스한 인품을 갖추신 분이시다. 이젠 이런 노덕(老德) 스님네가 큰 산으로 돌아 오셔서 여러 스님네에게 큰 나무가 되어 큰 그늘을 드리워 주실 것을 바라면서 이 대담을 시작 하였으며 주로 스님께서 율사니 만큼 한국 율의 방향에 대하여 여쭈어 보았는데 그 일부를 여기에 싣는다.

문 : 큰스님께서는 출가하실 당시만 하더라도 이조시대 불교의 잔재인 스님들을 업신여기는 풍조와 또 거기에다 대처승 문제 등, 참 어려운 시대를 살아 오셨는데 그 당시의 율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그 당시는 금방의 말대로 어려웠어요. 아무런 제도적인 장치가 없었지요. 거기에 대처승 문제도 심각했구요. 내가 범어사에서 보살계를 받는데 그냥 일반 여자신도들 속에 섞여 그렇게 보살계를 받았지요. 그러니 뭐 질서가 있었겠어요? 그저 1시간쯤 졸다 보니까 보살계를 받게 됐어요. 참 한심했지요?\"
문 : 그럼 그때 율사스님네로는 어떤 분이 계셨는지요?
\"뭐 특별이 율사라고 지청할 만한 이로 내 기억 속에 있는 분으로는 용성스님, 동산스님 그리고 별로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일봉스님이라는 분이 계셨지요. 일봉이라고 한일(一)자 새봉(鳳)자를 쓰신 분인데 그 인품과 덕망이 가히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을만한 분이었지요. 저도 퍽 존경해서 결국 내가 율을 연구하게 된 원인이 되기도 했지요.
그때는 지금 쓰는 것과 같은 계율이 없어서 그리고 잘 몰라 기도를 하고 여러 책을 찾고 그리고 책을 만들고 율을 정리하는 작업을 했지요. 물론 오늘날 지관스님이나 일타스님같은 이들이 다시 율을 많이 연구하고 그 계율을 만들고 했지만 그 방향 같은 것은 나의 영향이 조금 있다고 보아요.
요즘은 참 많이 계상(被相)은 연구되고 여러 책도 있어 어지간히 계에 대한 것도 밝혀지긴 했지만 이론적으로만 이해는 많이 하고 있을 뿐, 머리로만 알고 있지 실행이 없어요. 그러니 계율이라는 것이 부처님의 행인데 이해한다고 될 성질이 아니지요. 그 행함에 그 목적이 있다고 해야겠어요.\"
문 : 그럼 그때에도 오늘날과 같은 단일계단이 있었습니까?
\"없었지요. 다만 여러 곳에서 설했어요. 요즘 단일계단을 설하면서 느끼는 것은 너무 문중 중심이 되어서 서로 전계사나 교수스님이나 갈마스님등 갈라 먹기식이니 질서가 없어 큰 문제인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서로 할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근본 단일계단의 의미가 왜곡되지 않을까 걱정이로군요.\"
문 : 신도들을 위하여 요즘 어느 절에서나 보살계를 많이 설하는데 스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보십니까?
\"보살계는 실제로 중국에서 생겼지 남방불교에는 없어요. 다만 그 계품이나 계상은 훌륭하긴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오히려 범망경이 한국 불교에 더 나쁜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해요. 설(說)하는 사람은 많고 실제로 지키는 사람은 적으니까 형식적인 연례 행사에 불과하지요.
오히려 남방불교같이 팔관제를 신도들에게 지키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실행 가능한 것부터 해야겠지요. 처음 불교가 들어 온 신라나 고려시대에는 팔관계를 많이 지키고 설했지요.
근본 오계라도 착실히 잘 지키면 돼요. 부처님 당시에도 실천 가능한 것만 받게하고 철저히 지키라고 했는데 요즘은 너무 문란하고 안 지키고 형식적으로 계를 받는 것만 위주가 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 계에 대한 권위도 없고 번거렵기만 하지요. 오히려 신도들은 삼귀의의 정신과 팔관계와 5계를 받아 여법(如法)히 지키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문 : 스님이라면 인천(人天)의 스승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활해야 겠습니까?
\"계를 스승으로 삼아야겠지요. 버어마 스님들은 참 계를 엄격히 지켜서인지 고승도 참 많은 것 같아요. 오후불식 (午後不食)같은 어려운 계도 잘 지키고 생활이 퍽 고상하고 정돈되어 있지요. 해외를 다녀 보니까 한국 스님들은 그래도 풍족하게 산다고 보지요 스리랑카나 티뱃 스님들의 생활은 비참할 정도지요. 저녁을 먹고 싶어도 식량이 없어 뭘 먹을 수가 없지요. 그러니 지금 우리나라 스님들은 요즘 와서 오히려 너무 물질이 풍족하기 때문에 승려 생활의 기본이 흔들리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지요. 그래서 남방불교에서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북방불교 스님들을 별로 존경하지 않아요. 요즘 법사들처럼 말만 번드러하게 하면 뭘하나요. 더 중요한 것은 행원이지요. 오히려 말보다는 행동으로 훌륭하게 하는 것이 더욱 큰 법문을 하는 스님이라고 보지요. 그리고 작은 것에도 규범이 서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왜 많지 않아요. 시간관념, 약속 이행등 그런 것이 희박하거든요. 그리고 옛날에는 강당에서나 선원에서 경책을 많이 했지요. 그러면 모두 스님네가 순직해서 잘 받아들였지요. 그런데 요즘은 다들 너무 자기 주장이나 자기 변명이 많고 그리고 경책을 잘 안 받아들이지요. 승려 생활은 겸손하고 청빈한 것을 생명으로 알아야지요. 그리고 경책해 주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또 그것을 스승으로 삼아야 하리라고 생각 합니다.\"
문 : 요즘은 스님네가 대중처소 보다는 작은 암자의 주지나 그런 소임을 많이 찾고 또 지역 포교를 위해서는 필요로 한 것으로 보는데 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스님네는 가능한한 대중에 살아야해요. 대중스님네들이 알게 모르게 스승이 되니까요. 그리고 경책도 해 주고 그리고 승가의 일원(一員)원라는 의식도 있고 거기서 자기 생활의 신조도 나온다고 봐져요. 공동생활의 의미는 서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므로써 서로 서로가 원만한 인격을 갖춘다고 보지요.
그러니 대중에서 젊을 때에는 익히고 배우고 한 연후에 개인이 있을만한 작은 절에 가야지요. 포교도 좋지만 자신의 인격이 잘 다듬어진 후에야 포교가 되지 그런 기분이 없으면 나태해지고 신심도 적어서 수도 생활이나 승려 생활에 별 이득이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부처님 제자들이니까 너무 본사 그리고 문중만 따지는 풍조는 극복되어야 할 것 같아요. 물론 애사심(愛寺心)올 버리라는 말은 아니지만 전체 종도(宗徒)의 의견을 수렴해서 소아적인 자기 문중이나 본사라야만 된다는 의식은 이제 전체 불교를 위해서 지양되어야 할때라고 봅니다. 다소 개인이나 단체는 손해를 보더라도 전체를 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나도 살고 종단도 사는 길이니까요.\"
그동안 장시간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님의 말씀 받들어 열심히 수행 하겠습니다. 자주 오셔서 경책해 주십시요. 그럼 오래 이 산중에서 쉬었다 가시기 바라면서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우리 일행은 마음 한 가운데 기쁨을 느끼며 해인사로 돌아왔다.

(대담:향적, 편집: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