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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이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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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다루는 장인 - 여연 1984년 06월 28호
광야(廣野), 아득한 가슴의 들판, 그 심성(心性)의 뿌리없는 바람처럼 인도 땅을 헤메이다보면 어디서나 쉽게 부딪치게 되는 고대(古代)의 유물(遺物)들 앞에서는 그냥 침묵의 통한(通恨)을 맞게 된다.
물기 하나없는 황무지의 돌무더기 속에서 모진 바람에 엎드려 잠든 벽돌조각 하나에서, 폐허된 사원의 구석구석 이끼로 쌓여있는 수없는 종류의 신들의 흩어진 조상(影像)들 속에는 천년이나 이천년의 비밀스런 그 전율같은 침묵과 역사의 향기가 스며 잠들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하여 존재하는 모든 일체(一切)는 사라져 간다는 붓타의 말들이 되살아오듯, 살아있는 것들 또한 저렇게 아득한 시공속에서 잠들 수 있구나 하는 생명의 울림이 가득히 가슴에 고이기도 한다.
B.C 2세기에서 A.D 7세기까지 커다란 바위산을 뚫어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에서부터 깨달음의 이야기, 그리고 중생들의 교화와 붓타의 열반까지를 벽화와 조각으로 조성해온 아잔타석굴을 볼 것 같으면, 어떤 확실한 말과 몸짓과 행위 이전에 그 무엇으로 숨막히게 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은 경이의 깊은 곳으로 가라앉게 한다. 그것은 단순히 백화가 미(美)적으로 우수하다거나 불상이 예술적으로 정교하다는 그런 현상적인 미(美) 의 극치에서 오는 감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풀잎이 제 땅에 뿌리를 내려 제 스스로 생명의 물줄기로 영혼을 개화(開花)하여 또 다른 존재의 뿌리로 이어지는 저 끝없음들. 한 민족의 신앙하는 집단이 그 믿음의 대지에 뿌리를 내려 그들 스스로가 존재하는 빛으로, 또는 가치있는 삶의 자양으로 받아들인 그 진리의 물줄기를 역사라는 긴 수로(水路)를 통해 미래 인간의 넋 속에 가득히 넘치게 하고자하는 그런 숨결속의 경이함이리라. 그리고 그것은 마치 저 고대의 연금술사들이 어두운 회랑의 구석에서 반복된 생의 고통을 통해 또 다른 생의 의미를 캐내려는 그 적묵의 수렁 속으로 빠져 가는 어떤 절망의 냄새를 헤아리는 맛이라 할까.
아무튼 B.C 2세기에 시작되어 A.D 7세기에 이르러 이민족인 모슬렘의 침략의 전화(戰火)를 막기위해 은폐시켰다가 그뒤로 천백년 동안의 오랜 세월 속에 잠들어 1819년에야 깨어난 아잔타의 동굴은 생의 미묘한 떨림을 갖게 한다.
7백년 동안 쉬임 없이 자손과 자손, 헤아릴 수 없는 이웃과 이웃들의 죽음으로 하여 이어지는 저 간절한 소망들이 빚어낸 벽화와 조각들의 긴 숨결들. 한 인간이 한길로 온생을 가다듬어 그 존재의 지평을 확장해가며 생의 연원을 다듬는 것이 어디 말로써 쉽게 되는 일인가, 더구나 수많은 백성들이 그들의 온갖 탐욕의 생을 버리고 함께 한길을, 목숨이 끝나는 길까지 이어져 조상하는 그 넋이야말로 얼마나 신성한 울림을 주는 것인가.
오직 하나의 길을 끝없이 갈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그들의 죽음이 새로운 생명의 씨앗으로 열리는 눈부심, 그것은 확실히 이 시대의 성급하게 살려는 우리에게 맑은 진리의 생명체로 져며온다. 모든 것들에 있어서 성급한 이 시대의 민중들, 전반적으로 역사는 보는 안목과 그것을 지니는 숨결이 왜 이렇게 짧아졌을까. 모든 문화현상이 병리적으로 인스탄트화 되고 있다.
졸속주의, 찰라주의, 그리고 저 감각만을 탐식하는 허망한 메너리즘, 전체주의의 획일화가 주는 건조함, 대량화 되어가는 광장의 허황이 난무한 민중집회, 깊게 사고하려하지 않고 피상적으로 쉽게 살려는 경향들은 어디에서 유래되는 것일까. 우리는 왜 간난(艱難)과 신고(辛苦), 결핍을 참지 못하는가. 왜 어려움을 받아들이지 않고, 고통만 피해가는 방법만 쉽게 얻어 각자 개인만이 안락하려 하는가. 확대된 에고(ego)로 현실만을 살려는가. 이런 현상은 인류 역사상황이 한결같이 치달리고 있는 운명사적 위기이기도 하다.
이 시대의 현실이 피폐하고 수난의 저 목마름이 엉켜서 온다고 해서 어찌 그 현실 자체에서만 극복하고 해결해서만 되겠는가. 비록, 모든 가치가 살아있는 이 역사속에서만 소용(所用)되고 또한 종교가 이 시대의 민중에게 메세지를 전해야 되는 필연적 당위가 불가피하다고 해서 종교마저 성급하게 당장의 현실만을 치유하는 그런 짧은 안목이어서야 되겠는가..
현실의 진창올 좀더 깊고 긴 역사의 체에 걸러서 고뇌하는 모든 것들의 아픔을 잘 수렴하여 자기 것으로 지녀 가지면 아니 되는가.
거친 돌을 다루어 영혼의 저 간절한 숨결을 스미게하는 석수장이들이 그 시대의 역사 속에서 빚어지는 온갖 고난과 아픔을 참고 오직 그들의 길만 투철하게 지켜갔던 정신을 우리는 크게 배워야 할것 같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왜 장인들의 삶을 배우려 하지 않는가.
무죄를 불로 달구어 칼과 삶의 연장을 만들어내는 대장장이들, 한줌의 흙을 빚어 그릇을 굽는 옹기쟁이, 한판의 멋진 사설로 온갖 인간사를 풍자하는 소리꾼, 한 방울의 색체로 민중의 애환(哀歡)을 그려냈던 저 민화(民화)속의 환쟁이들. 이러한 사람들의 삶이란 결국 역사의 숨결 속으로 이어질 때 더 값진 것이 되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 고통받고 가난한 그들이 그 사회속에 더 많이 숨쉬어 그들의 길을 옳게 갈 수 있을 때 이 시대를 좀더 여유있는 삶을 영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한길로 한 사물을 절실하게 다루는 자가 장인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들의 삶이 미래의 역사를 빛나게 할때 인생의 진리를 깨닫코져 하는 자들은 자기의 본질적 자아를 건지는 장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인간을 다루는 장인이 아잔타의 석수장들이 지녔던 세월보다야 삶의 숨결이 짧아서야 되겠는가. 고통이 예비된 역사의 벌판으로 가는 예언자적 숨결 그런 가슴을 지어갖자.

편집자 주(注) : 종교가란 인간을 다루는 장인(匠人)이 아닐까. 앞으로 기회가 닿는대로 여러 필진들이 이 란을 해 장인들의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