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함경과 삼법인설(三法印說)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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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논단 - 법성
1984년 05월 27호
Ⅳ. 삼법인의 체험적 구현
삼법인에 대한 고찰의 결과 부처님의 교설과 모든 논리는 인간 구원에 귀착함이 밝게 드러났다. 그러면 이제 선적(禪的) 체험이 어떻게 종교적 신앙과 윤리적 실천으로 전환되어지는가를 삼법인의 중도적 구조를 여실히 보여주는 옛 선사의 게송을 통해서 살피기로 하자.
쌍림부대사(雙林傳大師)는 있고 없음의 대립이 끊어지고 가고 가지 않음이 없으며 얻고 잃음이 없는 중도적 삶의 모습과 그 실다운 모습대로 살아가는 자유인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빈 손에 호미 들고
걸어 가며 물소 타네
사람이 다리 위를 지나가는데
다리는 흐르고 물은 흐르지않네
空手把鋤頭 步行騎水牛 人從橋上過 橋流水不流
(禪門拈頌)
즉 부대사는 아무것도 갖지 않았으되(空手) 모든 것을 다 가지며(把鋤頭) 오고 가고 가고 오되(步行) 부동의 터전을 여의지 않는 삶의 진실상에 서 있었으니 그에게 있어서는 움직임(動)과 고요함(靜)이 별립의 장(場)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부대사의 송(頌)을 보지공선사(寶誌公揮師)는 인연 따라 일어난 유무생멸(有無生滅)의 법에 집착하지 않을 때 생멸과 자타가 없는 영원한 생명의 땅에 돌아갈 수 있고 부처님의 법신에 나아갈 수 있다.(往相廻向)는 뜻으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법신은 모습 없으니 빈 손이요(空)
색신은 모습 따르니 호미 쥠이네 (有)
걸어서 오가는 참뜻을 알면
오감없는 참성품이 인연 따라서 (不變)
오고 가는 모습으로 굴러감이니 (隨緣)
그것을 소탓다 이름하였네
참마음을 물로써 비유하니
물은 언제나 고요하고(涅槃寂靜)
인연으로 생긴 법은(妄體) 다리가 되니 (諸法無我)
다리는 스스로 흘러가네 (諸行無常 無我故無常)
참마음은 움직이지 아니하고 오직 몸이 움직이니
이것이 다리는 흐르고 물 흐르지 않는 뜻이네
法身無相爲空手 色身從有把鋤頭
若識步行來往意 眞隨妄轉名爲牛
眞心喩水水常寂 妄體爲橋自流
眞心不動唯身動 正是橋流水不流
그러나 열반은 연기의 세계를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열반은 가히 취할 모습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간법에도 출세간법에도 집착하지 않을 때 나고 멸하는 덧없는 삶의 흐름이 영원성의 현전(諸行無常一切空 郞是如來圓覺:證道歌)이 되는 것이며 대비원력 (大悲願力)의 시현이 되고 육바라밀(六波羅實)의 끝없는 실천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혜사선사(慧思揮師)는 이와 같은 입각처에 서서 부대사의 송을 재해석하여 제행무상이 열반적정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妙用)이요, 중생을 위한 자기 버림의 삶 자체인 것(還相廻向)을 다음 같이 노래하였다.
찰나찰나 덧없음은 빈 손이요 (諸法本空)
온갖 번뇌 끊어짐은 호미 쥠이네 (諸法不空 空寂靈知)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음 걸어감이요(用)
법계를 떠나지 않음은 흰 소 탑이네 (體)
여섯가지 바라밀법 다리를 삼아 소를 끌고 그 뒤를 지나가나니 온갖 행이 덧없음은 다리 흐름이요(諸行無常郞六度萬行)
참된 성품 맑고 맑아 물과 같으니
본래부터 고요함은 물 흐르지 않음이네 (六度萬行體中圓)
利那無常卽空手 爲除煩惱把鋤頭
定慧雙修步行意 不離法界騎白牛
六度爲橋牽牛過 諸行無常是橋流
法性淸淨猶如水 本來寂靜水不流
즉 공하되 공하지 않은 반야의 지혜는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삶의 본래적인 진설인 것이니, 혜사선사에게 있어서 하루 하루의 삶은 여래의 생사없는 땅에 돌아감이며 세간의 무상한 흐름은 여래의 무량공덕을 이 땅에 실현해가는 장엄불사였다. 또한 그에게는 선(禪)이 선이 아니라, 선이 곧 삼귀의(三歸依)며 사홍서원(四弘誓願)이며 육바라밀(六波羅憲)이였으며 닦음(修)이 곧 행함(行)이며 믿음(信)이 곧 얻음(證)이며 돌아감(歸命)이 곧 돌아옴(廻向)이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들의 얼룩지고 때묻은 삶의 현실이 고난과 좌절속에 있다 하더라도 혜사선사와 같이 그렇게 믿고 그렇게 행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여래의 방에 들어가(入如來室) 여래의 옷을 입고(着如來依) 여래의 자리에 앉아(坐如來依) 여래의 일은 행하는(行如來行) 여래의 사자일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삶과 역사는 그러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여래의 거룩한 장엄으로 스스로 장엄되어가는(以如來莊嚴而自莊嚴)정토구현의 현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