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미술의 세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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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강좌 - 취영
1984년 05월 27호
초기 불교미술을 논(論)하면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스투파(stupa) 즉 탑이다. 부처님의 유골인 사리(舍利 sarira)를 봉안하는 불교 건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며, 원시 불교에서 신도들의 신앙심을 응집하는 예배 대상으로써 다른 종교에서는 볼 수 없는 건축 양식이다.
부처님께서 구시나가라(Kush1agala)에서 열반에 드신 후 그 당시 독실하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던 여덟나라의 왕들이 서로 부처님의 유골인 사리를 차지 할려는 분쟁이 일어 났을때, 초기 경전인 아함경에 보면 향성바라문(香姓波羅門)이라는 현명한 바라문의 의견에 따라 8등분 되어 탑을 세웠는데 그것이 근본 팔탑(八塔)이며 피브라와(piprahwa)와 바이샤리(vaisali)의 유적지(遺蹟址)에서 나온 사리용기(舍利容器)등으로 그 규모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대개 탑의 조성에는 아쇼카왕에 의한 8만4천 탑의 조성등을 아육왕전(阿育王傳)이나 선견율비바사(善見律毘波沙) 제 l권에서 전하고 있으나 이러한 것은 8만4천이 실수(實數)의 개념은 아니고 4와 8을 숫자의 기본단위로 살고있는 인도인의 사유(思惟)에서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되며 오히려 슝가(sunga)시대에 와서 대규모의 탑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을 산견(散見)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는 그 당시 신흥 종교인 불교나 자이나교에 의하여 위축되었던 브라만교가 다시 쉬바(Shiva)라던지 비쉬누(vishiI1u)같은 상(神像)을 조성함으로써 민간신앙에 새로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으므로 불교 신자들도 이때까지의 인간적이며 소박한 숭배 대상이었던 부처님을 신격화시키고 그 유골인 사리를 신앙화함으로써 더욱 많은 탑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대개 그 당시에 세워진 탑의 모습은 오늘날 흔히 우리나라 사원에서 볼 수 있는 그러한 모습이 아니고 그 시대의 대표적인 탑의 하나인 산치(sanchi)대탑과 같이 높이가 15m나 되고 기단의 직경이 35m내외의 거대한 탑이며 그 탑 주변에는 3m 내외의 난간 모양의 울타리를 두르고 7m 내외의 탑문(塔門)을 설치하여 탑을 보호하고 탑을 장엄했는데, 그 탑문과 탑신에 새겨진 문양은 자아타카나 불전(佛典)에 나타난 부처님의 전생(前生)과 제세시(在世時)의 신비한 행적을 정교한 수법으로 조각하였다.
이러한 표현은 상당히 세련되어 사실적이고 정교하여 불교미술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탑신(塔身)은 원래 벽돌을 가지고 마치 바가지나 바루를 엎어놓은 것과 같은 모양으로 쌓은 단순한 구조이고 모양은 대체로 보리수, 금강보좌(金剛寶座), 법륜 등으로 부처님의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여러가지 부처님과 관련된 상징물로써 표현하였다. 승원(僧院)이나 석굴사원은 아직 불상이 없는 사원으로써 이 시대의 미술을 일러 무불상시대(無佛像時代)라고도 한다.
이 시대의 것으로 남아있는 가장 유명한 걸작들은 바라후트(Bhalf1at)의 난순과 탑문, 붓다가야(Buddhagaya)의 난순, 산치 대탑의 난순과 탑문, 그리고 바자(Baja), 피탈코라(pitalkhora), 카를리(Karlli) 석존의 조각과 아잔타 석굴의 제l0굴, 제9굴의 벽화의 일부등에 모두다 공(共)히 부처님의 상(像)의 표현이 없다는 점이다.
이렇게 직접적인 불상의 표현을 아니한 이유로는 여러 가지의 설이 있으나 그것은 부처님을 신성시하여 일반 브라만교의 제신(諸神)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그 상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과 부처님의 몸을 감히 표현할 수 없다는 지극한 존경의 생각으로 조성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인 견해였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즉 아직 인격 신상(神像)에 대한 예배의 경험이 없던 그 당시 불교도에겐 부처님을 인격신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경(不敬)이라고 생각하였는바 부처님을 표현할 장소에는 그 상황에 따라 탄생을 나타낼 때는 무우수(無憂樹) 나무로, 깨달음을 나타낼 때에는 보리수(菩提樹) 나무를, 열반을 나타낼 때에는 사라수(沙羅樹)를 표현하였으며 설법을 상징하는 법륜이나 불좌(佛座)나 불족도(佛足圖)등도 초기 불교의 중요한 예배 대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