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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과 삼법인설(三法印說)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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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논단 - 법성 1984년 04월 26호
3. 삼법인 (三法印) 이해의 문제점
1 ) 문제의 제기
앞에서 이미 개괄적으로 고찰한 바와 같이 불타께서는 연기설로써 전변설(輾變說)과 적취설(積聚說)의 치우친 존재론을 파사하여 생명의 중도실상(中道室相)을 열어 보였다. 또한 잡다한 「이데올로기」와 사상의 혼돈 속에 방황하는 인간들에게 삶의 본래적인 무한지평(無限地平)을 열어주기 위해 오온(五縕) 십이처 (十二處) 십팔계 (十八界) 설로써 실상구조 해명의 빛을 삼았다.
아함경은 다시 이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제법이 인간의 실천과 인식에 결부되어질 때 나타나는 존재의 양상을 세가지 특징적인 모습(三特相, dharma-lahsana)으로 범주 체계화시켜서 보여준다. 이것을 법의 진실 여부를 가리는 판단의 기준이 된다고 하여 삼법인(三法印, dharma-mudra)이라 한다.
삼법인이란 아함경의 도처에서 오온 십이처 십팔계가 모두 덧없고 괴로우며 내가 없다고 하는 말씀을 일체개고(一切皆苦),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으로 요약한 것이다. 다시 증일아함경에서는 고, 무아, 무상에 열반적정(涅槃寂淨)을 덧붙여 네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인연으로 쫓아 난 것이므로 고유한 실체가 없고, 실체가 없으므로 영원한 과정속에서 새롭게 규정되어 간다고 하는 존재의 무한히 열려진 실상을 등지고 존재를 하나의 실체로서 고착시키려 할 때 인간의 집착과 고통은 발생하고 여실지(如室知)로써 집착을 떠나면 곧 열반이므로 고통과 열반은 실체적인 대립과 분리의 세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삼법인에 일체개고를 넣든 열반적정을 넣든 대의 상의 차이는 없으며 오히려 불교의 근본 목적이 인간의 고적 상황을 극복해서 고통이 지멸된 해탈과 열반, 정토(淨士)를 지향하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현재 삼법인에 대한 이해 태도는 세가지 법인이 서로 같음도 없고 다름도 없다는 중도적 입장에서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중도적 실천행을 장애하고 있으니 그것은 두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첫째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나누어 보려는 이원적 이해 태도요「 둘째 제법무아와 제행무상을 철저히 과정과 관계로서만 해석하여 열반을 과정속에 분해시켜 버리는 것이다.

2 ) 치우친 이해 태도
첫째, 이원적인 삼법인의 이해 태도는 동국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일부 불교학자들의 불교개론서나 논문에 나타나는 견해들이다. 즉 제법무아와 제행무상은 현상계의 측면이고 열반적정은 이상계라고 주장한다거나 또한 십이처 (十二處)와 업(業)등은 세간법의 체계이며 유위법(有爲法)으로서 조복되고 대치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견해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등 제법의 시설(施設)이 전변설과 적취설을 지양하여 중도를 보이기 위한 논리형식임을 모르는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불타께서 일체(一切)가 무엇인가를 묻는 제자에게 눈과 빛깔,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뜻과 법의 열두가지 입처(入處)로서 보이신 뜻은 무엇인가 하면 부처님께서는 오직 현상적인 존재만을 말씀하심으로써 초월적인 실재자를 부정하고 다시 주관과 객관, 물질과 마음이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보이심으로써 중도를 들어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십이처는 연기 (緣起)이므로 공(空)한 것이요, 공한것이므로 중도인 것이니 십이처를 실체화시키는 망집(妄執)만이 조복의 대상이 되는 것이요, 망집이 사라지면 십이처가 곧 중도제인 것이다.
다음 열반을 부정하는 견해는 무아(無我), 무상(無常)을 철저히 사회적 관계와 역사 과정만으로 해석함으로써 생명의 전체성과 영원성을 사물화 된 관계와 자정성 가운데 매몰시켜 버리는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인간 존채를 역사주의와 전체주의에 종속시켜 버림으로써 필연은 필연 그 자체에서 초극해버리는 삶의 본질적 자유를 차단해 버리는 것이다.

3) 중도적 해설
위에서 생명의 참모습에 부합된 실다운 인식의 빛(如室知)을 가로막는 두가지 치우친 견해를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삼법인에 대한 중도적 이해의 입장은 무엇인가,
부처님은 생명의 중도적 본원에 귀착하지 못하고 연(緣)을 쫓아 일고 지는 세간성을 실체로서 국집하는 중생에게는 무아(無我)의 말씀으로 본래 기멸이 없는 생명의 본체를 보였으며, 다시 제법이 무아한 생명의 본체를 국집하여 공(空)에 빠진 중생에게는 제행이 무상하다고 설파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잡아함경 안무상경 (眼無常經) 에서 눈이 덧없다한 뜻과 법화경에서 눈이 영원하다. (淸種常眼)한 뜻이 둘이 없는 것이다. 이와같은 중도의 진실과 본원에 귀착하여 상(常)에도 무상(無常)에도 머물지 않을 때 인간은 세간과 출세간의 집착에서 모두 벗어나 열반을 구현할 수 있는 것이며 역사와 사회를 해방된 진리의 사회로 전환시켜갈 수 있는 대비(大悲)의 사람이 될수 있는 것이다. (계속)